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4관왕을 석권하면서 한국은 물론 전 세계의 영화 역사를 새로 썼다. 더욱이 비영어권국가에서 그것도 가장 백미인 작품상을 거머쥐어서 희열이 컸다.
필자는 영화광은 아니다. 그러나 ‘영화로 본 리더십’을 강의하면서 영화에 푹 빠졌다. 강의는 나라를 지키고 백성의 기쁨과 고통을 좌우하는 ‘지도자의 리더십’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명장면이다. 대역 광해가 편전(便殿)에서 주재하는 조회(朝會)에서 판서들이 앞다투어 명(明)나라에 보낼 조공을 진언한다.
호조판서는 황실에 은자 4만5천냥, 놋그릇 70사, 공녀(貢女) 40명을 보내자고 한다. 예조판서는 사신에게 금 한 관을 선물하자고 한다. 병조판서는 후금과 전쟁 중에 있는 명에 기마 500두, 궁수 3천명, 기병 1천명을 포함해 2만명 파병을 제안한다. 비주류 참판이 “2만명이나 보내면 북방 경비가 소홀해질 수 있을 텐데”라면서 걱정하자 주류 정승이 “이 나라가 있는 것이 누구 덕이냐. 오랑캐와 싸우다 짓밟히는 한이 있더라도 사대(事大)의 예를 다해야 한다”고 면박을 준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해 이 영화의 명장면을 다시 보는 것 같다. 이번 장면의 주된 차이는 왕부터 중국과 ‘운명공동체’라고 하면서 앞장섰다는 점이다. 판서들도 덩달아 중국에 마스크 수백만 장을 비롯 500만달러 규모의 물품을 조공하고 있다. 이미 방호복 10만개, 안면보호구 약 5천개, 라텍스 장갑 14만켤레, 분무형 소독기 1천470대 등이 중국에 전달됐다.
반면에 정작 우리 의료진은 방호복이 없고 백성은 나라 잃은 난민도 아닌데 마스크 한 장 구해보겠다고 길고 긴 줄을 서고 있다. 이제는 마스크 배급제마저 시행된다고 한다. 무시무시한 전염력에도 불구하고 병상 부족으로 집에 머무는 감염자도 상당수다.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집안에만 갇혀 있는데 아이들마저 돌보라고 하니 갑갑함에 울화통이 치밀어 오른다.
우리는 발병국이며 감염원인 중국인의 출입을 막지 않는데 적반하장격으로 중국에서 우리 백성은 무시당하고 있다. 전 세계 100여 개국에서 출입금지, 강제 격리를 당하는 국제적 미아라는 수모까지 겪고 있다.
코로나19 확진자가 8일 오전 9시 기준 7천 명을 넘어섰고 사망자는 50명에 육박하며 의심환자도 16만 명에 이르렀다. 사람을 만나야 사는 세상인데 사람 만나기가 두려운 세상이 됐다. 백성의 소중한 일상이 무너졌고 나라는 거의 정지된 듯하다. ‘코리안이 코로나’가 됐다는 자조적인 말까지 나왔다. 세계 10위 산업대국이요, 아카데미 상까지 휩쓰는 코리아가 어쩌다 이 지경이 돼가는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영화는 백성의 고달픈 삶을 몸소 겪은 거지출신의 대역왕이 정승판서들의 사대굴종 언행에 분노하면서 명장면이 됐다. “백성이 지아비라 부르는 왕이라면 빼앗고 훔치고 빌어먹을지언정 내 그들을 살려야겠소. 그대들이 죽고 못 사는 사대의 예(禮)보다 내 나라 내 백성이 열 곱절 백 곱절은 더 소중하오.”
창문마저 열기가 두려운 이 아침에,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의료진에게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내 백성이 더 소중하다”는 광해의 외침이 더욱 크게 메아리쳐 온다.
김기호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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