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지금] 젊은 아스트리드

2년 전 북유럽 극장가에 개봉된 영화 한 편이 있었다. 영화 제목이 ‘영 아스트리드(Young Astrid)’였다. 우리말로 ‘젊은 시절의 아스트리드’라고 번역하면 되겠다. 스웨덴의 20크로나(Krona) 지폐에 새겨져 있는 인물이다. 평생 한 손에 펜을 들고 살았던 여성이다.

아스트리드는 조선의 마지막 국왕 순종이 즉위하던 1907년 스웨덴에서 태어났다. 스톡홀름 근교의 소박한 집에서 전원생활로 유년시절을 보낸 그녀는 청춘이 시작될 무렵 수도 스톡홀름에 직장을 구했다. 젊은 아스트리드는 처음으로 찾게 된 일터에서 난생 처음 보람을 찾았다. 젊은 그녀에게 보람 외에 찾아온 것이 있었다. 느닷없이 찾아온 불청객은 사랑이었다.

소리없이 다가온 사랑의 감정에 몸을 의지한 그녀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녀 곁에는 배우자가 있는 남자가 있었다. 직장 상사였고 연상의 남자였다. 감정의 포로가 된 한 청춘에게 부도덕이란 단어는 떠오르지도 않았고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그 짧은 사랑도 책임이 따라야만 했다. 금지된 장난은 대가를 요구했다.

아스트리드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어머니는 딸의 몸에 변화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모성(母性)은 딸을 조용히 안고 있었다. 세상에는 또 다른 순리가 있다고 속삭이는 듯했다. 야간 기차에 무거운 몸을 실은 젊은 아스트리드는 멀리 남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소리쳤다. 이것이 인생이야. 나의 인생.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나의 인생.

조산원에서 출산한 그녀는 다시 새 일터로 돌아와야 했다. 아이를 맡기고 떠나는 얼굴에 젊은 여인의 우울함이 스며 있었다. 나의 아기였고 보모가 키워야 하는 아이였다.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던 남자는 무책임으로 지난날을 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남자의 특권이었고 동시에 일상이었다. 20세기 초반의 유럽에는 윤리도 있었고, 불륜도 있었다.

몇 년 후 다시 보육원을 찾은 아스트리드는 아이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순간 당혹해한다. 그러나 핏줄은 핏줄이었다. 함께 시간을 보내며 모자(母子)는 맞잡은 손의 온기를 느끼기 시작한다. 세상이 그녀를 속여도 그녀는 노여워하지 않았다. 또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인생을 알게 된 아스트리드는 펜을 잡았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은 이후 창작활동의 길을 걸었다. 쓰지 못할 것이 없었고, 상상하지 못할 일이 없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작품을 남긴 그녀는 2002년 이 멋진 세상과 작별을 고했다. 말괄량이 삐삐는 그녀가 남긴 주옥같은 동화 중 하나이다. 독서율이 최고인 나라 스웨덴이 그냥 있었을 리 없다. 그녀가 떠난 해에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끼친 그녀의 영향력을 고려하여 만든 상이 바로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Astrid Lindgren Award)이다.

노벨문학상과 마찬가지로 이 고매한 상 역시 정서적 풍요와 지적 상상력을 창조해 내는 작가에게 영예가 주어진다. 한겨울에 시상하는 노벨상과 달리, 아동들의 마음이 화사하게 피어나는 봄에 린드그렌상이 수상자를 부른다.

월계관을 생각하며 뛰는 사람에게 월계관은 잘 다가오지 않는다. 트로피를 바라보고 글을 쓰는 사람에게 영예가 미소 짓지 않을 것이다. 순수한 열정으로, 쉬지 않고 글을 쓰는 사람에게 월계관이 다가온다. 한국의 어느 아동작가에게 영예가 주어졌다. 노력의 대가이고 인내의 귀결일 것이다.

최승현 경기도 국제관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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