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단상] 빗물처럼 햇빛도 흘러라

이성수
이성수

영화 ‘기생충’을 관통하며 흐르는 중요한 상징은 ‘물’이다. 물의 흐름은 강렬하게 두 번 나타난다. 대저택을 빠져나와 반지하집으로 향하던 폭우 속에서, 잠시 멈춰선 기우는 계단 아래로 쏟아져 내리며 발목을 적시는 빗물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막을 길 없는 순류(順流)를 관조하는 그 체념에서, 영화가 드러내는 사회계층제의 냉엄한 현실이 가슴을 파고든다.

한편, 빗물에 잠긴 반지하집 화장실에서, 기정은 역류(逆流)하는 오물을 덮으며 변기 뚜껑에 주저앉아 담배에 불을 붙인다. ‘흐름’을 거스르는 덧없는 반항으로 읽히는 이 장면에서 계층제 현실에 대한 아픈 자각은 관객의 마음에 못 박히며 박제된다.

기택 가족이 대저택에서 잠시 호사를 훔치다가 반지하집으로 추락해 원점으로 돌아온 것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빗물처럼 어쩔 도리 없는 자연의 이치다. 거역할 수 없는 중력은 흐르는 빗물을 반지하에 고이게 하며 계급사회의 단단한 기둥을 지탱한다. 잠깐이나마 아래에서 위로 역류하려던 기택 가족을, 중력은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자연의 섭리는 ‘침수’라는 벌을 통해 ‘너희가 있어야 할 자리는 반지하’라고 기택 가족에게 가르친 것이다. 기택 가족이 저지른 일탈에 대한 대가치고는 좀 과하다 싶은 이 응징의 지점에서 영화는 무서운 냉정함으로 현실을 일깨운다.

더 잔인한 사실은, 행복이란 누군가의 불행을 거름 삼아 꽃핀다는 것이다. 폭우에 잠기는 반지하 덕분에 최고층 펜트하우스는 아늑할 수 있다. 침수된 반지하를 아랑곳하지 않고 갈수록 견고해지는 계층적 사회구조는 물리적 중력처럼 법칙으로 굳어진 사회적 중력 위에 우뚝 서 있다. 그런데 계급사회의 구조적 안정성을 담보하는 중력법칙은 하나가 더 있다. ‘1층은 100층이 없어도 상관없지만, 100층은 1층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 기층민(基層民)이 위태롭게 되면 기득권층도 온전치 못할 것이다.

빗물로 가득 찬 반지하집에서 기우는 산수경석(山水景石)이 중력을 거슬러 물 위로 떠오르는 환영(幻影)을 본다. 가라앉지 않고 떠오르는 돌덩이는 자본주의적 계층제를 향한 날카로운 경고다. 영화 막바지의 난장판 비극은 결국 기우가 가져간 산수경석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보이게 또는 보이지 않게 일상 속 여기저기 상존하는 자본주의적 계급의 무자비한 칼날에는 눈이 없다. 1층 100층을 가리지 않고 누구든 해칠 수 있는 위험이라는 것이다.

‘나눔과 배려’는 그 위험을 줄이며 안정과 안전을 보장하는 또 하나의 사회적 중력이다. 자본주의는 낭떠러지를 향해 질주하는 위험한 본성을 갖고 있다. 나눔과 배려는 공멸을 향한 그 폭주를 막는 브레이크이자, 1층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키는 ‘따뜻한 이기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받기만 하고 줄 줄을 모르는 사해(死海)는 죽은 바다다. 다른 바다와 달리 물이 들어오는 입구만 있고 나가는 출구가 없기 때문이다. 흘러들어오는 물이 나갈 수 없으니 수증기로 증발되고 염분만이 축적되어 생명이 살 수 없는 것이다.

나눔과 배려는, 우리 사회가 사해가 되지 않도록 흐르는 물이다. ‘더불어 사는 삶’의 가치를 새삼 되새겨 본다. ‘더불어’라는 말은 ‘함께’라는 의미 외에 ‘그에 더하여’라는 뜻도 품고 있다. 이타(利他)는 다시 이기(利己)로 돌아와 원래 있던 것들을 더 풍요롭게 한다.

영화관 밖으로 나와 올려다본 높은 빌딩은 하늘에 얼굴을 담근 채 햇살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그 햇살이 아래층에도 골고루 퍼지기를, 빗물이 아래로 흐르듯 햇빛도 아래로 흐르기를 소망한다.

이성수 동두천시의회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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