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한국형 뉴딜, 어디로 갈 것인가?

왜 사람들은 글을 읽다가 중요한 문장이 나오면 습관처럼 줄을 긋고 별표를 달게 되었을까. ‘별표를 달다’라는 뜻을 갖고 있는 애스터리스크(asterisk)는 ‘little star(작은 별)’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asterikos’에서 왔다. 재앙이라는 뜻의 디제스터(disaster)는 그리스어로 ‘별(aster)’이 ‘없는(dis)’ 상태를 의미한다. 망망대해에서 선원들에게 별은 항로의 방향을 잡아주었고, 별이 사라진다는 건 죽음이나 다름없었다. 한 사회가 큰 재난이 발생했을 때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잃으면 더 큰 혼란과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방향을 잃고 혼란해진 틈을 타 경쟁과 돈으로 생존을 사고파는 끔찍한 방향으로 사회가 변하고 있다. 재난을 이윤 추구의 기회로 활용하려는 자본주의를 가리켜 나오미 클라인은 <쇼크 독트린: 자본주의 재앙의 도래>에서 ‘재난 자본주의(disaster capitalism)’라 이름을 붙였다. 재난을 기회로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이 결탁해 공공의 부를 사물화하고 불평등을 확대하려 한다는 주장이다.

정부는 지난 7일 제2차 비상경제 중앙대책본부 회의에서 ‘한국판 뉴딜 추진 방향’을 발표했다. 3대 프로젝트로는 ‘디지털 인프라 구축’, ‘비대면 산업 육성’, ‘사회간접자본 디지털화’로 설정했다. 디지털 경제로의 가속화가 기본 방향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번 한국판 뉴딜에도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해결을 위한 희망의 좌표인 별, ‘방향성’이 없어 보인다. 그러다 보니 코로나19 위기 국면을 틈타 재벌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른바 ‘재난 자본주의’가 심화될 것이라는 비판과 사람 없는 경제, 탈고용 경제가 앞당겨질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사실 ‘한국형 뉴딜’은 노무현 정부 때부터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 이르기까지 단골처럼 등장했다. 건설 산업이 일자리 창출 효과가 크다는 전제하에 건설 산업을 연착륙시키는 방식으로 추진됐다. 새로운 합의(New Deal)라는 철학(방향)이 제거되고 방법(토목사업)만으로 사업이 진행됐다. 결과적으로 집값만 올렸다는 노무현 정부의 ‘한국형 뉴딜’, ‘녹색’도 ‘뉴딜’도 없다는 비판을 받았던 이명박 정부의 ‘녹색 뉴딜’, 3대 미스터리라 불렸던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도 사실은 ‘스타트뉴딜’을 말하는 것이었고, 모두 처절한 실패로 끝났다.

“세계적인 재난을 이용해 돈을 버는 백만장자가 미국에서 단 한 명도 나오질 않길 바란다.” 뉴딜 정책을 추진했던 루스벨트 대통령이 제2차 세계 대전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는 자들을 강하게 비난한 말이다. 그가 추진했던 뉴딜은 토목사업 확대가 아닌 구제와 부흥, 개혁을 내세운 그야말로 정책의 방향을 대전환하는 혁명이었다. ‘한국형 뉴딜’ 또한 재난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새로운 합의’, 과거와 다른 방식의 ‘대전환’으로 방향을 재검토해야 한다.

‘한국형 뉴딜’은 사람을 향해야 한다. 지구 생명체를 구해야 한다. 재정건전성을 이유로 3조원가량 더 필요했던 긴급재난지원금의 전 국민 지급 방침에 난색을 표하며 시간을 끌었던 기재부가 대기업에 지원되는 40조원가량의 기간산업안정기금은 무섭도록 빠르게 처리했다. 공존의 가치는 소수 기업의 이윤보다 소중하다. ‘혁신성장’의 이름으로 추진했지만 지지부진했던 대기업친화적인 사업들을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조성된 불안감으로 돌파하겠다는 것이 ‘한국형 뉴딜 정책’이라는 비판을 아프게 받아들여야 한다.

오현순 매니페스토연구소장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