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정치 여정 명예롭게 마감… 웰다잉 전도사로 인생 2막”
“세상 일이라는 게 다 시작할 때가 있으면 마무리할 때가 있는 것 아니겠나”
30여 년의 긴 정치 여정을 마무리한 더불어민주당 원혜영 전 의원(70)의 소회다. 지난 1988년 한겨레민주당 대변인으로 정계에 입문한 뒤 5선 국회의원, 민선 2·3기 부천시장 등을 지낸 원혜영 전 의원은 “마무리할 때를 잘 선택하는 것도 정치인으로서 중요한 일”이라며 담담하게 말했다.
원 전 의원은 지난 2012년 국회선진화법 제정을 주도했던 일을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꼽았다. 그러면서도 “국회를 대화의 장으로 발전시켜보자는 취지에서 국회선진화법을 만들었는데 20대 국회에서 패스트트랙 사태가 벌어졌다”며 안타까움을 피력했다.
또한 민선 2·3기 부천시장으로서 버스도착시간 안내시스템을 세계 최초로 개발해 실용화한 일, 부천을 문화도시로 재창조한 일 등을 의미 있었다고 회고했다. 원 전 의원은 21대 국회가 ‘일하는 국회’, ‘싸우지 않는 국회’로 거듭나기를 기원하며 후배 정치인들에게 “공부하는 국회의원이 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제는 국회를 떠난 원 전 의원은 앞으로 웰다잉(Well-Dying) 시민운동, 기부문화 선진화 운동에 매진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그는 “장수시대를 맞아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자기결정의 문제들을 고민하고 실천함으로써 개개인의 삶이 풍요해지고 우리 사회의 갈등이나 부담을 줄어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고 있는 원 전 의원의 얘기를 들어봤다.
▲불출마 결심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30년 가까이 국회의원, 부천시장을 지냈는데, 이제 마무리할 때가 됐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했다. 세상 일이라는 게 다 시작할 때가 있으면 마무리할 때가 있는 것 아니겠나. 또 우리가 요즘 장수시대를 맞았는데 한 가지 일만 끝까지 하기에는 너무나 긴 세월이다. 중간에 한번 마무리 짓고 제2의 인생을 여유 있게 시작하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일각에선 ‘21대 국회에 들어가면 국회의장을 하는 건 떼놓은 당상 아니냐’며 아쉬워하는 분이 많았는데 고마운 일이다. 나로서도 얼마나 영광이겠나. 그렇지만 내 나름대로 원칙이 있다. 지난 30년간 7선의 선출직 공직자로서 열심히 보람있게 일했다. 마무리할 때를 잘 선택하는 것도 정치인으로서 중요한 일이다.
▲마지막 임무로 민주당 공천관리위원장을 맡아 압승 기반을 다졌다. 이번 총선 결과의 의미는.
이번 총선은 지난 대선과 마찬가지로 촛불 혁명의 진행과정 속에서 있었던 정치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시민들이 촛불 혁명을 완수하도록 그렇게 국회의 틀을 짜준 게 아닌가 한다. 촛불 혁명의 계기가 된 대통령 탄핵 문제는 국민이 요구했고 그 뜻을 받들어 국회가 결정한 것이다. 여야의 구도만 보면 탄핵이 있을 수가 없었다. 대등한 의석이었다.
그런데 미래통합당은 그 뒤에 탄핵 자체를 부정했다. 인정하고 극복하기 위한 어떤 노력이 있었어야 했다. 하지만 ‘탄핵은 음모에 의한 거다’, ‘조작됐다’고 하는 감성적인 목소리들이 주도권을 갖다 보니 거기에 갇혀버린 게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면서 국민이 야당을 대안 세력으로 인정하지 못했고 총선에서 큰 격차가 나게 됐다.
▲정치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뭐니뭐니해도 지난 18대 국회 당시 당의 초대 원내대표를 했을 때가 기억난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고 우리는 소수 야당이었다. 당시 MB 정권이 법안 100여 개를 한꺼번에 강행처리하려는 걸 막으려고 크리스마스 이브에 본회의장을 점거해 보름간 투쟁에 나섰고 MB 악법의 일괄강행 처리를 저지했다. 그때 ‘국회를 언제까지 몸싸움의 장으로 전락시킬 것이냐’, ‘국회를 대화와 타협의 장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려면 여당은 다수라고 무조건 밀어붙이지 못하게 하고 야당은 국회 운영의 원리를 무시한 채 몸으로, 집단으로 의사진행을 방해하는 일이 없어야 했다. 그래서 51%가 아닌 60%까지 동의가 돼야 의사를 진행할 수 있도록 했고, 소수 세력에겐 무제한 필리버스터를 허용해주는 국회선진화법을 제정했다. 그걸 주도한 게 가장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국회를 대화와 타협의 장으로 발전시켜보자는 취지에서 여야가 합의해 국회선진화법을 만들었는데 그렇게 되지 못했다. 식물국회라고 지탄받고 더 나아가 20대 국회에서 선진화법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패스트트랙 사태가 벌어지는 등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졌다.
▲부천시장 재임 시절 가장 뿌듯했던 일은.
버스도착시간 안내시스템(BIS)을 부천시가 세계 최초로 개발해 실용화했다. 전기도 에디슨이 발명했다고 하지만 그 당시 많은 발명이 있었던 건데 그걸 최초로 에디슨이 실용화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부천시가 세계 최초로 개발해 실용화한 BIS를 몇 년 뒤 서울시가 도입하고 지금은 뉴욕, 베이징 등 세계로 퍼졌다. 국회의원 시절 국정감사 때 아제르바이잔의 바쿠라는 도시에 갔었는데 거기서도 BIS가 운영되는 걸 봤다. 우리 부천시뿐만 아니라 전 세계 시민이 버스의 도착시각을 알 수 있고 편리하게 이용하고 있어 뿌듯했다. 좋은 사회, 선진화된 사회라는 게 다른 게 아니고 예측 가능한 사회라고 본다. BIS야말로 예측 가능한 생활 문화를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또 하나는 부천을 문화도시로 재창조한 것이다. 부천시장 시절 문화도시 만들기를 최고의 목표로 뒀다. 그 중 핵심 프로젝트가 만화도시 사업이다. 만화는 시민에게 익숙한 대중문화인데, 국가 차원의 관리나 지원 육성 대책이 없었다. 그래서 부천만화정보센터, 만화 박물관을 만들고 세계만화축제를 하고, 거기에 애니메이션을 붙여 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등을 개최했다. 부천이 만화, 애니메이션에 있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도시가 됐고, 국내외적으로 높이 평가하니 자랑스러운 일이다.
▲정치권을 떠나며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일하는 국회, 싸우지 않는 국회를 만들지 못하고 그만둔 게 제일 아쉽고 안타깝다. 21대 국회는 대화와 타협 원리를 지켜 여야가 함께 일하고, 함께 성과를 내는 국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싸우지 않는 국회, 일하는 국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회의 자체를 여는 걸 갖고 여야가 싸우지 말아야 한다. 그건 헌법이 부과한 국회의원의 책무다. 회의를 여냐, 마느냐를 가지고 여야가 밀고 당기다 보니 열어야 할 회의도 못 여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이런 일은 21대 국회에서 정말 되풀이되면 안 된다.
▲후배 정치인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국회의원이 다루는 문제들은 너무나 폭넓고 하나하나가 까다로운 문제다. 그래서 국회의원은 항상 공부해야 한다. 저 역시 공부하는 자세를 갖고 의정 생활을 해야 한다고 후배들에게 조언해왔다. 아무리 많이 알아도 자신이 아는 것만 갖고 정치를 하면 결국 시대에 뒤떨어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부딪히는 새로운 문제에 대한 올바른 대책을 마련하기 어렵다. 그래서 공부해야 한다. 그걸 제일 강조하고 싶다.
▲웰다잉 시민운동에 매진할 것이라고 들었다.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지난 몇 년 동안 국회에서 제일 집중적으로 노력해온 게 웰다잉 문화조성이라는 과제와 기부문화 선진화라는 과제, 두 가지다. 그동안 의학 기술이 발달해 연명치료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생겼는데, 최근 5년 전까지는 법으로 연명 의료를 받지 않을 권리를 보장받지 못했다.
의학 기술이 발달하며 과거에는 노환으로 별세했던 게 지금은 인공호흡도 하고, 심폐소생도 하고, 투석도 하면서 수명이 연장됐다. 만약 그렇게 치료를 지속해서 건강이 회복되면 당연히 치료해야 한다. 제가 얘기하는 건 수명만 연장되는 무의미한 연명 의료를 말하는 거다.
예컨대 과거에는 만약에 인공호흡기를 떼면 병원이 처벌받았다. 그러다 보니 환자는 괴롭고 원하지 않는데 인공호흡기를 떼지 못했다. 그래서 지난 2016년 1월 무의미한 연명 의료에 대한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법적으로 제도화하는 ‘호스피스·완화 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 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의 제정을 주도했다.
이 일에 나서면서 장수시대 삶의 마무리에 대한 자기 결정의 과제가 많이 있다는 걸 알았다. 연명 의료에 대한 자기 결정권, 또한 내가 죽을 때 재산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도 중요한 결정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유언장 작성 운동이 있다. 그밖에 장기기증, 화장 등을 할 것인지, 장례 절차는 어떻게 할 것인지 등 다양한 문제들이 내 삶의 마무리에 대한 결정 과제다.
장수시대를 맞아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자기결정의 문제들을 고민하고 실천함으로써 개개인의 삶이 풍요해지고 우리 사회의 갈등이나 부담을 줄어들 것이다.
▲웰다잉 시민운동 등 향후 계획은.
웰다잉 시민운동과 기부문화 선진화 운동이 만나는 접점이 유산기부 운동이라고 본다. 우리 사회는 열심히 일해 크든 작든 부를 형성한 세대가 이제 노년기에 이르렀다. 그분들이 자기가 평생 일해 모은 재산을 자기 뜻대로 정리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재산에 대한 자기 결정권이다. 이건 유언장 작성을 통해 이뤄진다. 그 과정에서 내가 귀하게 모은 재산 일부를 10%든, 20%든 좋은 일에, 또는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쓰이도록 기부하는 것이다.
이런 운동을 하면 우리 사회가 건강해지고 통합이 이뤄질 거라고 기대한다. 최근 코로나19 위기 때문에 정부가 과거엔 있을 수 없던 대대적인 재정지원에 나섰다.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이걸 재정에만 맡길 게 아니라 기부 문화를 활성화하면 어떨까 생각한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상생의 문화를 만드는 데 기부문화 선진화가 중요하다. 특히 새롭게 효과적으로 성과를 낼 수 있는 게 유산 기부 운동이다. 있는 재산을 곧바로 기부하라면 여러 가지 부담이 있다. 하지만 어차피 죽을 때 못 가져가는 재산인데, 이 중 일부를 의미 있는 일에 쓰이도록 기부하는 건 우리 사회를 통합하고 품격있는 사회로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웰다잉 문화 조성 사업과 기부문화 활성화 사업을 연결하는 핵심사업으로 유산기부 운동을 열심히 하려고 준비 중이다.
웰다잉 시민운동 외에도 새로운 은퇴 생활의 여유와 재미를 계속 만들려고 노력하겠다. 인생의 여유와 재미는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지 않나.
송우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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