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시론] ‘씨름’이라고 언제부터 불렀을까?

“단옷날 씨름 놀이 마을마다 장정이라, 임금님 앞에서도 재간을 놀렸다네. 이기건 지건 간에 모두가 기뻐하여, 푸른 버들 그늘 속에 온당이 들썩이네.”

추사 김정희의 씨름을 예찬하는 시다. 씨름은 고려의 충혜왕은 물론 조선시대의 사대부와 백성이 즐긴 민속놀이다. 승정원 연리 김이는 씨름을 잘해 세종대왕의 호위 무사가 됐고, 오성과 한음의 이항복은 씨름으로 감히 맞설 자가 없었다. 명종 때 암행어사를 지낸 김홍도는 동료와 씨름을 했고, 어린 유생들조차 그 재미에 빠져버렸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 숙종 편에는 청나라 사신들이 씨름인(角抵人) 200명을 뽑아 달라 요청하고, 각저희(角抵戱)를 하여 연속 다섯 판을 이긴 다섯 명에게 직접 시상하기도 할 정도로 씨름은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는 씨름을 각력희(角力戱), 각저희(角抵戱), 각력(角力), 각저(角抵) 등으로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는 다리 각자를 사용한 각희(脚戱)도 보이고, 일제강점기의 신문에는 씨름을 각력(脚力)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각력(脚力)은 ‘짐꾼’을 의미하는 것으로 씨름의 ‘각력(角力)’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하지만, 일본은 씨름을 한민족의 민속놀이가 아닌 원나라의 경기이며, 무식한 자들이나 하는 저급한 경기로 취급하고자 다리 각자의 각력(脚力)을 사용하게 했다. 결국 해방이 되고 나서 지금의 ‘씨름’으로 통일됐다.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국어사전에는 일본의 스모인 상박(相撲)을 우리 민속 고유의 경기 씨름으로 정의하고 있다. 상박은 조선왕조실록에 두 차례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고, 승정원일기에서는 정조 때 다섯 차례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우리 씨름으로 해석할 수 있는 내용이 전혀 아닌 ‘서로 마주 때린다’는 의미일 뿐이다. 스모는 스스로 몸집을 불려 상대를 밖으로 밀어내면서 영토를 확장하려는 전투적 야욕이 숨어 있는 그들만의 경기다. 경기장 내에서 승부를 끝맺는 평화 지향적 성격의 씨름과는 전혀 다르다. 이를 굳이 우리 민속 고유의 경기 씨름으로 정의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다만, 중국어 학습서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에서 중국의 상박을 씨름으로 해석한 정도다.

그동안 씨름이 다양하게 기록되어 온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100여 년 전의 신문 기록을 보더라도 해석하는 것이 쉽지 않고,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계층과 지방마다 방언이 더 심했기 때문에 용어의 차이는 인정이 된다.

씨름의 어원은 1446년 9월 훈민정음(訓民正音)이 반포된 이후 석보상절(釋譜詳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석보상절에는 “조달이와 난팅이 서로 ‘실흠’하니 둘의 힘이 같아서 태자가 둘을 잡아 넘어뜨리시며 대신 염광이라 하리”라는 기록이 있다.

이 ‘실흠’은 오늘날의 ‘씨름’을 의미한다. 이미 조선 초기에 ‘실흠’이라는 용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면 석보상절에 기록되는 일은 없었다. 물론 한글이 조금 더 일찍 창제되었다면 석보상절 편찬 이전에 씨름이라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었을 것인데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 우리는 씨름이란 용어가 언제부터 불렸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패러다임(Paradigm)이 그리스의 언어를 토대로 영어가 된 것처럼, 씨름도 몽골의 영향을 받아 오늘날의 ‘씨름’이 되었다는 설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현재도 씨름은 오직 한국사회에서만 사용되고 있고, 전승됐다는 점에서 틀림없이 우리의 자생용어인 것이 확실하다.

공성배 세계용무도위원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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