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에는 거북선에 관한 기록이 세 군데 나온다. 1592년 2월 8일 “거북선에 사용할 돛에 다는 베 29필을 받았다”, 3월 27일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을 시험했다”, 4월 12일 “식후에 배를 타고 거북선의 지자포(地字砲), 현자포(玄字砲)를 쏘았다”. 이순신이 해전에서 승리한 후 올린 장계(狀啓)에는 거북선의 형태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나온다. 1592년 6월 14일 당포해전 장계에는 “신이 일찍이 왜적의 난리가 있을 것을 걱정하고, 특별히 거북선을 만들었는데 앞에는 용의 머리를 붙여 입으로는 대포를 쏘고, 등에는 쇠못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어도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고···”라고 표현했다.
‘이충무공전서’ 앞부분에 실려 있는 두 개의 그림은 거북선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흔히 ‘통제영 거북선’과 ‘전라좌수영 거북선’이 그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충무공전서’는 임진왜란 이후 약 200여 년이 경과한 1795년에 발간됐다. 대표적인 논란의 핵심은 철갑선이냐 아니냐, 2층이냐 3층이냐의 문제다. 엄청나게 꼼꼼했던 이순신이 거북선의 제작 과정이나 제원과 성능, 운영방식에 대한 기록을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거북선뿐 아니라 한산대첩에 나오는 학익진이나 명량해전에 나오는 일자진 같은 전투 대형들이 실전에서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모습이나 그런 진법을 펼쳐야 했던 전술적인 필연성을 기록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마도 이순신은 난중일기를 군사 작전 보고서가 아니라 사적인 전투일기로 여겼던 것이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소설가 김훈은 난중일기를 ‘수식을 배제한 무인다운 글의 전범(典範)’이라고 평했다. 사료적 가치는 물론 문학적으로도 탁월하다. 난중일기는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개인의 일기 형식이지만 교전 상황이나 개인적 소회, 당시 날씨나 지형과 백성들의 생활상까지 상세하게 기록했다.
내가 아쉬워하는 대목이라는 것도 모두 이순신에 대한 존경과 애정의 산물이다. 그렇게 꼼꼼했던 분이 이런 부분은 왜 빠트렸을까하는 일종의 투정이다. 임진왜란은 외부의 침입으로 인한 전쟁이었지만 지금 우리나라는 내전 중이다. 정치에 초연했던 이순신이지만 오늘의 현실을 보면 무어라 말할 것인가? 참담하기 그지없다.
이인재 건국대 행정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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