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3·1절 그날의 함성은

1919년 3월1일 오후, 민족대표 33인은 서울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다. 이와 동시에 탑골공원에서는 학생과 시민들이 스스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거리로 나와 만세시위를 벌였다. 같은 날 전국 곳곳에서도 조선 독립을 외치는 시위가 들불처럼 일었다. 3ㆍ1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3ㆍ1운동은 우리 민족사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독립운동이다. 독립선언이 있던 3월1일 이후 두 달간 1천500여회 시위가 전국 방방곡곡에서 있었고 2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가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무엇이 있어서 평범한 사람들이 총칼로 무장한 일제의 서슬 퍼런 강압에 맨몸으로 맞설 수 있도록 했을까.

많은 요인이 있겠지만 3ㆍ1 독립선언문 속에서 우리 민족을 하나로 묶어 움직이게 했던 원동력을 찾을 수 있다. 3ㆍ1 독립선언문에는 한 나라의 ‘자주적 시민’으로서 ‘우리 민족 모두의 나라’가 담겨 있다. 선언문에서는 반상(班常)의 구별도, 남녀(男女)의 구별도, 직업의 구별도 없다. 오직 조선의 독립과 자주적 시민만이 있을 뿐이다. 독립 만세를 외치는 모두의 나라가 담긴 것이다.

그 속에는 국민이 주인인 민주(民主)적 가치와 구성원 전부가 지향하는 공공의 선을 따르는 공화(共和)적 가치가 모두 담겨 있다. 이는 일제의 강압을 넘어선 우리 민족 모두가 나아가고자 하는 분명한 지향점이었고 모두가 하나 될 수 있도록 만드는 가치였다. 그날의 함성이 주는 울림이 백년의 시간을 넘을 수 있는 이유다.

3ㆍ1운동이 있은지 꼭 102년이 되는 날이다. 3ㆍ1운동의 의미에 비춰 최근 경기도 공공기관의 이전 결정을 생각하니 너무나 아쉽다. 무엇이 그렇게 급했을까. 공공기관 이전 결정은 ‘민주’적이지도, 도민 모두의 바람을 담지도 못했다. 오히려 경기도의 갑작스런 이전 발표로 도민들의 혼란만 부추겼다.

남부와 북부 간의 이견이 표출되고 있으며 공공기관 유치를 위한 각 시ㆍ군 간 경쟁 역시 가열되고 있다. 이는 경기도 공공기관 이전 발표가 도민 모두의 바람과 마음을 담아내지 못한 반쪽짜리였음을 보여준다. 경기도 균형발전이라는 도민 모두의 공감대가 있음에도 말이다.

경기도 균형발전이라는 대의를 담아낼 더 큰 그릇이 필요하다. 민주적이지 못한 결정은 필연적으로 갈등과 문제를 낳는다. 균형발전이라는 모두가 동의하는 공통의 가치가 있기에 우리는 더 나은 결정과 더 발전된 미래를 그릴 수 있다. 결코 혼자 먼저 가서는 성공할 수 없다. 3월1일 그날의 함성이 우리 후손들에게 들려주는 교훈이다.

장현국 경기도의회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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