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당 최남선의 ‘혼자 앉아서’란 시조가 있다.
『가만히 오는 비가 낙수져서 소리하니
오마지 않은 이가 일도 없이 기다려져
열린 듯 닫힌 문으로 눈이 자주 가더라』
‘오마지 않은’은 ‘오겠다고 하지 않은’이란 뜻이다. 이 시조의 백미는 마지막 구절의 ‘열린 듯 닫힌 문’이다. 옛날 툇마루에 앉아 사립문이든 나무판자로 만든 문이든 닫힌 문을 보며 누구를 기다려 본 사람은 안다. 계속 바라봐도 닫혀 있는데 금방이라도 삐걱하며 열릴 것 같다. ‘기다린다’는 외로움과 그리움의 깊이를 느낀 적이 없는 사람은 암호문일 뿐이다. 친일 딱지가 붙은 육당이지만 우리말을 이렇게 멋스럽게 닦아냈다.
노산 이은상의 ‘소경 되어지이다’란 양장(兩章) 시조가 있다.
『뵈오려 못 뵈는 님, 눈감으니 보이시네
감아야 보이신다면 소경 되어지이다』(원문)
시각 장애인 입장에서는 황당한 얘기지만 임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애틋하게 표현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시는 조율(調律)된 말이요, 춤은 조율된 걸음걸이’라고 말했다.
나쓰메 소세키(1867-1916) 작품 12권을 번역한 송태욱 씨는 소세키 번역은 다른 책보다 3배가 더 걸렸다고 한다. 단어량이 일본 현대 작가에 비해 10배 이상 많았기 때문이다.
소세키 시대 일본의 문해력이 90% 정도로 전 세계에서 가장 높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모르는 단어와 문장을 습득하려는 일본 국민의 열기 덕분이다. 우리가 쓰는 한자의 상당수가 메이지 시대 일본인들이 만든 한자다.
유려한 우리말을 쓰고 배우는 노력은 도외시한 채 일본식 한자를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한마디로 난센스다. 얼마 전 어느 신문사에서 이미 사라졌거나 점차 사라져가고 있는 전국의 옛말과 입말, 지역어 2만2683개를 모아 ‘말모이, 다시 쓰는 우리말 사전’을 만들었다.
‘말모이’는 최초의 우리말 사전 원고 이름이다. 1911년 국어학자 주시경 선생이 ‘말모이’란 이름으로 최초의 국어사전 편찬을 시작해 해방 이후 ‘우리말 큰 사전’을 완간했다.
지금 우리말은 급속도로, 그리고 광범위하게 부서지고 있다. 소설가 김훈은 “현재 대한민국은 남을 이해하는 능력이 전혀 없고, 매일 악다구니, 쌍소리, 욕지거리로 날이 지고 새는 사회가 됐다”고 말했다.
앞서 인용했던 육당과 노산의 시조를 보면 우리말의 운율과 숨결을 잘 표현하고 있다. 우리말을 잘 다스려 옳고 바르고 깨끗하게 만들어야 할 의무는 남 일이 아니라 내 일이고 우리 일이다.
세상에는 잊어야 할 일이 있고 잊어서는 안될 일이 있다.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찾는 노력은 결코 잊어서는 안될 일이다.
이인재 건국대 행정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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