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론] 압구정과 반구정

압구정(狎鷗亭)은 조선의 권신 한명회(韓明澮)의 호(號)다. 지금의 압구정동에 그의 정자가 있었다.

압구정은 친할 압(狎) 자와 갈매기 구(鷗) 자를 쓴다. 벼슬을 버리고 강가에 살면서 갈매기와 친하게 지낸다는 뜻이다. 말만 그렇지 한명회는 압구정에서 유유자적하면서 즐기기만 한 것이 아니라 조정의 실권자로서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부렸다.

계유정란(癸酉靖亂)의 주역인 한명회는 영의정을 세 차례나 지내고 두 딸을 예종과 성종에게 시집보냈다. 쿠데타 과정에 김종서 등 많은 사람을 죽였기에 그를 미워했던 사람들은 친할 압(狎) 대신에 누를 압(押) 자를 써서 압구정(押鷗亭)이라고 불렀다.

중국 북송 시대의 명재상 한기(韓琦)는 백성을 사랑하고 성품이 겸손해 칭송이 자자했다. 그의 집 이름이 ’압구정‘이었다. 당송팔대가인 구양수(歐陽修)가 그를 칭송해 쓴 시가 있다. 한명회는 이런 사연이 있는 이름을 명나라의 한림학사인 예겸(倪謙)에게 직접 받아와 정자에 걸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그러나 권력욕에 가득 찬 한명회는 ’압구정‘이란 이름만 취했을 뿐 거기에 담긴 뜻과는 거리가 멀었다. 살아서는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한명회는 죽은 후 부관참시를 당했다.

반구정(伴鷗亭)은 세종 때 명신 황희(黃喜) 정승의 정자다. 파주 임진강 변에 있다. 반구정은 ‘갈매기와 더불어 친하게 지내는 정자’란 뜻이다.

조선 중기 허목(許穆)이 지은 ‘반구정기’(伴鷗亭記)에 보면 “조수 때마다 백구(흰 갈매기)가 강 위로 모여들어 들판 모래사장에 가득하다”라고 묘사돼 있다.

압구정의 압(狎) 자나 반구정의 반(伴) 자 모두 친하다는 말이지만 조금 뉘앙스가 다르다. ‘익숙하다, 편안하다, 버릇없이 너무 친하다‘란 뜻의 압(狎) 자에는 업신여긴다는 뜻이 있다.

한명회는 이런 한자를 알고 썼을까. 그리고 똑같은 갈매기랑 친했는데 왜 황희는 명신이란 소리를 듣고 한명회는 권신이란 오명을 쓰고 있을까.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황희도 허물이 많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과보다는 공이 크기에 그를 명신이라고 부른다. 반면, 한명회는 정권을 찬탈해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권모술수와 사리사욕의 대명사로 불린다.

같은 뜻의 한자를 썼지만 다르게 들린다. 사람들을 업신여긴 한명회는 압(狎)이요, 노비도 존중했던 황희는 반(伴)이다.

하지만 누구의 삶을 살겠냐고 물으면 한명회 쪽도 만만치 않을 거 같다. 요즘 나라 망치는 인간들에 비교하면 한명회는 양반이다.

이인재 건국대 행정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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