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취재] “인천 만수동 대공분실… 대시민 역사공간 만들자”

5·3 항쟁 역사 한획… 민주화운동 기억공간 조성 커지는 목소리
현재 경찰청 국유지 빈 공간, 활용 방안은 아직… 市, DB 구축

노동 운동가들에게 극한의 공포와 단절감을 주기 위해 만든 조사실의 좁은 창문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인천 남동구 만수동 산30의2 옛 인천 경찰국 대공분실 건물 앞으로 한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장용준기자

인천 남동구 만수동 산30-2 빨간 벽돌 건물. 현재는 초·중학교와 아파트 단지가 둘러싼 이 건물이 공포의 ‘대공분실’이었다는 것을 아는 인천시민은 많지 않다. 인천의 민주화·노동운동의 수많은 운동가들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공포의 공간인 이곳은 지난해 11월 인천경찰청 광역수사대의 구월동 이전으로 텅 빈채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본보는 1987년 1월14일 고문을 받다 숨진 박종철 열사 35주기를 맞아 치열했던 인천의 민주화·노동운동의 역사를 기억하고, 반성하기 위해 대공분실을 시민에게 돌려줄 방안을 찾고자 한다. <편집자주>

인천 남동구 만수동 산30-2 옛 만수동 대공분실의 현재 모습. 장용준기자
인천 남동구 만수동 산30-2 옛 만수동 대공분실의 현재 모습. 장용준기자

대지 3천404㎡ 지하1층~지상2층 규모의 대공분실이 인천에 들어선 건 지난 1986년 12월29일이다. 경기도 경찰국 사찰과의 분실로 시작한 이곳은 1987년 2월27일 인천직할시 경찰국이 개국하면서 ‘인천경찰국 대공분실’로 개칭했다.

이른바 ‘만수동 대공분실’로 불린 이곳은 인천지역노동자연맹, 인천부천노동자회, 노동자문화마당 일터,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등 인천의 굵직한 민주화·노동운동가들이 고초를 겪어야 했던 공간이다.

인천여성노동자회 회장을 지낸 김지선씨(67·고(故) 노회찬 전 국회의원의 부인)는 1987년 4월 대공분실 인근 야산으로 끌려가 10시간이 넘도록 폭행을 당했고,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 김씨의 동료들은 만수동 대공분실 안에서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인노회 막내로 시작해 노동자문화마당 일터 의장으로 활동한 김동호씨(59)는 며칠동안 잠을 재우지 않던 경찰들 때문에 환각과 환청을 겪어야 했고, 동료들 중에는 만수동 대공분실을 겪은 뒤 정신 이상을 호소하다 분신을 한 이도 있다.

인천은 6월 항쟁의 도화선이라고 볼 수 있는 ‘5·3민주항쟁’이 있을 정도로 민주화운동 역사에서 큰 역할을 한 곳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정작 인천에서는 그 당시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공간이 전무하다.

 

1990년대까지 대공분실로 사용했던 이곳은 2018년 보안수사대가 구월동 인천경찰청 본청사로 들어간 뒤 수사국 지능범죄수사대, 현 광역수사대가 지난해 11월까지 사용해왔다. 장용준기자
1990년대까지 대공분실로 사용했던 이곳은 2018년 보안수사대가 구월동 인천경찰청 본청사로 들어간 뒤 수사국 지능범죄수사대, 현 광역수사대가 지난해 11월까지 사용해왔다. 장용준기자

경찰청 국유지인 이 곳은 현재 빈 공간이며 아직 활용 방안이 없다. 올해 광역수사대 문학동 청사가 신축공사에 들어가면 2023년까지 임시청사로 활용을 검토 중일 뿐이다. 지역 사회에서는 이 공간이 인천의 민주화운동을 기억할 시민의 역사공간으로 꾸며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인천시도 이 같은 고민에서 출발해 지난해 말부터 인천지역의 민주화·노동운동 건축자산을 체계적으로 보전하기 위한 태스크포스(TF)를 꾸리고, 건축 자산의 데이터베이스(DB)를 구축하고 있다. 이 작업에 만수동 대공분실은 반드시 포함해야 할 공간이다.

오경종 인천민주화운동센터장은 “이 곳은 독재정권이 민주화운동을 한 국민을 불법적으로 탄압한 장소인 만큼, 이제라도 민주화운동을 기억할 대시민 역사공간으로 다시 태어 나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청년이나 학생들이 지금의 민주주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할 현장체험이 필요한데 인천에는 과거를 기억할 공간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공기가 너무 많아 소중함을 모르듯 자유와 민주주가 어떻게 얻어진지 모르고 살고 있다”며 “만수동 대공분실을 교육의 현장이자 체험의 현장으로 조성해 다시는 민주주의를 뺏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만수동 대공분실로 사용하던 시절, 각 조사실에는 밖을 볼 수 없는 좁은 창문 하나(빨간 네모)만 존재했다. 장용준기자
만수동 대공분실로 사용하던 시절, 각 조사실에는 밖을 볼 수 없는 좁은 창문 하나(빨간 네모)만 존재했다. 장용준기자

 수십년 흘렀지만 ‘고문의 악몽’ 

노동운동가 김지선씨(67)와 김동호씨(59)는 기억하기 조차 두려운 고통을 경험한 공포의 빨간벽돌 대공분실을 생각하면 아직도 진저리가 처진다.

학교와 주택가에 둘러싸여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 건물을 떠올리면 극한의 공포와 단절감을 주던 차가운 계단과 좁은 창문 등 고통스러웠던 당시의 악몽이 살아난다.

故 노회찬 의원 부인 김지선씨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만 주세요.”

1987년 4월28일. 인천의 대표적인 여성 노동운동가이자 고(故 )노회찬 국회의원의 부인 김지선씨(67)는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하고 있다. 여동생을 만나려던 그녀를 덮친 형사 2명, 강제로 태워진 승용차, 5시간 동안 다른 노동운동가들의 행방을 대라며 이어진 심문. 그리고 밤 10시40분, 그녀를 인계한 4명의 형사들은 김씨 머리에 자루를 씌우고, 수갑을 채운 뒤 머리를 다리 사이에 처박게 했다. 그렇게 폭언과 구타가 이어졌다.

수십분간 폭행을 당하며 남동구의 한 야산으로 끌려갔다. 그곳이 만수동 대공분실 인근의 야산이란 사실은 모진 고초를 겪은 뒤에서야 알았다고 했다. 1986년 ‘인천 5·3사태’의 여파로 이어진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 그들은 뻔뻔하게도 그 일을 입에 올렸다. 바지 지퍼를 내리고 무릎으로 김씨의 가슴을 짓누른 형사들은 “너도 한 번 당해볼래?” 협박했다. 공포가 온 몸을 덮쳐왔다. 자루가 씌워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살려달라” 비는 것 뿐이었다.

“그때는 살아야겠다는 생각뿐 이었어요. 살려달라고,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고 빌었죠.”

얼마간 이어진 고문이 끝나고 이들은 다시 김씨를 차에 태워 30여분을 뱅뱅 돌았다. 그리곤 머리 위 자루를 벗겨주더니 앞만 보고 뛰라고 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게 뛰었다. 얼마 뒤, 김씨는 만수동 대공분실의 실체를 마주했다. 갑자기 사라진 동료,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던 그는 만수동 대공분실에 있었다.

“전화를 걸어서 최대한 순진한 척 연기하면서 집에 큰 일이 있어 꼭 만나야 한다고 했어요. 그때서야 ‘그럼 찾아오라’하더라고요.”

새까만 철문, 그 두꺼운 철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선 김씨는 소리쳤다. “○○○, 여기 있어?” 형사들은 그녀를 말리며 ‘이곳은 산업체다. 무슨 말이냐. 가족 맞느냐’ 추궁했다. 수많은 민주화·노동운동가들이 그곳에 있었음에도.

노동운동가 김동호씨 “소리소문없이 죽겠구나 싶었어요.” 

1992년 9월 30일. 여느때와 다름 없이 남구(현 미추홀구) 숭의동의 문화마당 ‘일터’ 사무실로 가려 집을 나선 김동호씨(59)가 순식간에 4명의 수사관에게 붙잡혀 승용차에 태워졌다. 양팔을 뒤로꺾어 수갑을 채우고, 머리를 숙이도록 처박는다. 얼마를 달렸을까. 수사관에게 둘러싸여 들어간 그곳, 만수동 대공분실에서 마주한 건 유난히 차갑게 느껴지던 계단과 층계 사이에 하얀색 로프로 설치해둔 그물이다.

처음에는 여러차례 폭행과 욕설에 시달리고, 잠도 재워주지 않았다. 김씨는 “2~3일정도 잠을 못자니까 흡음판을 따라서 말이 달리는 것 같은 환각이 보이더라”며 “사람이 잠을 못자면 이렇게 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갇혀있는 시간동안 김씨를 가장 힘들고 두렵게 했던 건 수사관의 폭행도, 욕설도 아닌 ‘소리소문없이, 아무도 모르게 죽을 수 있다’는 막연한 공포였다.

“가족들이 안에 잡혀간 걸 알고 건물 앞에 와 고래고래 소리쳤어요. 그때서야 ‘이제 아무도 모르게 죽진 않겠구나’ 안도했습니다.”

바깥쪽으로 잠금장치가 달린 조사실 문이 열린 채 혼자 남겨졌던 순간, 그는 복도로 뛰쳐나가 소리쳤다. “얘들아, 힘내. 형이야.” 복도를 지키는 수사관이 그를 다시 조사실에 집어넣기까지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는 누군가 옆에 있다는 사실이 주는 안도감을 다른 동료들에게도 주고 싶었다고 했다.

1986년 12월29일, 처음 그곳에 자리잡은 뒤 36년이 지난 대공분실은 이제 텅 빈 채 제 역할을 기다리고 있다. 수많은 민주화·노동운동가들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말이다.

김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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