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시론] 노후의 가난

검은 호랑이해, 임인년(壬寅年)이 이미 시작된 듯하지만, 사실은 이제야말로 본격적인 시작이다. 이런 겹침, 혼동은 음력과 양력의 차이에서 비롯하고, 전통과 쇄신의 알력이 그만큼 크다는 걸 실감케 한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때 양력 1월1일을 그대로 설로 삼았다. 일본 때문에 억지로 ‘양력설’을 쇠야 했던 우리는 ‘(음력)설’을 독립운동처럼 쇠야 했고, 중국에서 ‘춘절’로 거듭난 것 처럼 ‘민속의 날’을 거쳐 마침내 ‘설’로 거듭났다. 설이 그냥 설이 아닌 셈이다.

건강할 때 재미 삼아 이따금 하던 산책을 지금은 숙제처럼 진지하게 매일 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전에 산책하다가 자주 보였지만 그냥 넘어갔던 모습이 떠올랐다. 캐리어, 손수레, 리어카 등을 이용해 박스를 줍는 노인들 모습이다. 저마다 구역이 있어 보이기도 했다. 같은 할머니·할아버지가 같은 시간에 같은 곳에서 박스들을 쌓아두고 정리하거나 모으곤 하였다. 한때 실업률이 치솟던 때에는 젊은 사람들이 트럭을 몰고 다니며 그 박스들을 선점해 싹쓸이하던 때도 있었다. 지금 그런 사람들이 눈에 잘 띄지 않는 건 취업 사정이 나아진 덕보다는 폐휴지 수입원으로는 생활이 불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저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변함이 없다. 얼마나 버실까? 차마 물어볼 엄두가 나질 않는다.

노후준비가 자식 농사로 통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 뒤로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에 아래로 자녀부양, 위로는 부모 공양에 온 힘을 쓰다가 정작 본인의 노후대비에 소홀했던 게 우리 윗세대까지, 저 박스 줍는 노인들까지 흔한 경우였다.

물 한 그릇으로 주린 배를 채우고 그 힘든 보릿고개 힘겹게 넘기면서 자식들에겐 가난을 물리지 않겠다고 땀 흘려 오늘의 경제 대국을 이룩한 주역들이 핵가족화와 양극화로 인한 각자도생의 시대 노인 빈곤율·자살률 세계 최상위 국가에서 박스를 주우며 살아간다.

국가의 경제 수준이나 기술력 그리고 K-콘텐츠가 세계를 휩쓸며 우리 대한민국의 위상이 치솟는 중이다. 그러나 모두가 누려야 할 풍요에서 제외된 이들이 아직 너무 많아 안타깝고 민망하다. 20년 뒤쯤 노인 인구 비중이 35%를 넘는 시대가 다가온다. 통계를 보면 60세 정년퇴임 이후 35.3%가 일을 해야만 생계를 꾸려갈 수 있다고 한다. 우리와 비슷한 경제 수준의 서구 노인들은 연금으로 비교적 걱정 없이 노후를 보낸다. 그런데 노인 45% 이상이 가난에 내몰려 다시 일을 찾아 나서야 생계가 유지되는 게 우리 현실이다.

정부의 공익형 일자리는 27만원 수준, 이런 일자리 사업으로는 노후의 빈곤에서 벗어날 수 없다. 박스 값이라도 후하게 쳐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러면 다시 트럭들이 등장해 구역을 빼앗아간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노후의 가난을 제대로 해결할 수 있는 역량 있는 대통령을 이번 대선에서는 기대할 수 있을까?

김근홍 강남대 교수·한독교육복지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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