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는 시간은 삶에서 빠트릴 수 없는 행복한 순간이다. 우리 시대의 음식은 영양가보다 “맛”이 가장 강력한 선택의 조건이 되었다. 양식은 맛과 분위기를 매우 중시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양식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서양 요리 100년의 역사를 만나는 시간 여행
안성시 일죽면에 자리한 한국조리박물관에도 봄이 무르익고 있었다. 박물관 1관 입구 벽면에 새겨진 “한국 서양조리 100년의 역사를 만나는 시간여행”이란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한국조리박물관(관장 최수근)은 국내 최초일 뿐 아니라 프랑스와 미국을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개관한 1종의 조리전문박물관이다. 자국의 음식문화를 일찍부터 세계에 알려온 중국이나 일본보다 한국이 조리박물관을 먼저 세웠다니 놀랍다. 이 엄청난 일을 실현한 설립자의 생각과 철학은 무엇일까. 조리박물관 1관과 2관, 연회장에 세미나실까지 갖춘 조리박물관 건물 앞 벚나무 아래 놓인 벤치에 최수근 관장과 마주 앉았다.
한국인 1호로 프랑스 요리학교 ‘르 꼬르동 블루’에서 공부한 최수근 관장은 유명 호텔을 거쳐 식품학 박사로 영남대와 경희대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학계와 업계에 ‘소스의 대가’로 알려진 최 관장은 두 번의 운명적인 만남을 들려주었다. “1983년 조리에 대한 열망을 안고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지요. 프랑스에서 공부할 때 전 세계 조리인들에게 영감을 준 조르주 오귀스트 에스코피에(1846~1935)의 이름을 건 에스코피에박물관을 찾았는데, 그 분의 업적과 삶을 잘 보존해 놓은 박물관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곳에서 ‘나도 조리의 역사를 집대성하고 조리인에게 힘이 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1984년부터 수집을 시작했지요. 현장을 거쳐 대학에서 제자를 가르치며 30여 년 동안 수집한 소장품이 1,200여 점이 되었으나 실현은 요원하더군요. 단지 꿈으로 끝나는 것은 아닐까 염려하던 2015년 어느 봄날, 문화와 교육에 큰 관심을 기울이던 ㈜HK 이향천 대표를 만났습니다. 박물관을 설립하려는 나의 꿈을 이야기했더니 놀랍게도 이 대표가 크게 반겨주시더군요. 이 대표는 저의 오랜 꿈을 현실로 만들어주신 분입니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개관한 한국조리박물관
박물관 설립이 구체화 되어가자 조리 관련 전시품들이 더욱 필요해졌다. 이때 국내 조리 분야의 원로와 명장들이 기꺼이 최 관장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박물관 설립에 대한 자문과 더불어 귀중한 자료를 기증해 주고 고증해 주었다. 2016년에 자문위원회를 조직하여 박물관 설립은 박차를 가해 2019년에 박물관 설립계획 승인을 거쳐 2020년 10월 사립박물관으로 정식 등록되었다.
“한국조리박물관은 한국 조리문화 발전에 이바지한 선배 조리사들의 업적을 충실히 기록하고 기억하는 공간입니다. 박물관에 소장된 수많은 자료 속에는 한 개인의 삶과 철학이 오롯이 담겨 있지요. 한평생을 조리분야에 종사하며 조리를 발전시킨 선배 조리인들의 땀과 발자취가 선명히 남아 있습니다. 그 발자취는 많은 후배 조리인들의 가슴에 깊은 울림이 될 것이라 기대합니다. 한국조리박물관이 지나간 100년의 역사는 물론 다가올 100년, 그 이후의 시간까지 써 내려가는 세계 3대 조리박물관으로 도약하기를 희망합니다. 무엇보다 조리에 꿈을 가진 청소년에게 비전을 주고, 조리 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자긍심을 주고 싶습니다. 물론 일반 관람객들에게는 흥미로운 요리의 세계로 안내해 줄 것입니다.”
설명을 들으니 박물관 전시실이 더욱 궁금해진다. 자리를 옮겨 박물관에 들어선다. 박물관에는 문화관광해설사가 배치되어 있으니 해설을 요청하면 안내를 받을 수 있다. 이날은 특별히 배정민 학예사가 시간을 내주었다.
■여덟 개의 테마로 이루어진 박물관
박물관은 국내 서양 조리역사의 발전사를 한눈에 파악하도록 시기별, 주제별, 인물별로 전시관을 구성하고 있다. 흑백사진 한 장이 눈길을 끈다. 대한제국 시기 독일인 여성 손탁이 경영한 손탁호텔이다. 조리역사와 호텔의 역사는 맞물려 있다. 그 사진 앞에는 우아한 주전자와 고급 컵, 티스푼이 놓여 있다. 그 시대를 증거하는 유물들이다. 아주 특별한 유물도 만나볼 수 있다. ‘탄피 깍지’는 한국전쟁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조리에 특별한 관심이나 조예가 없어도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도록 동선을 재미있게 구성하였다.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가끔 생각에 잠긴다. “이 맛있는 것을 누가 어떻게 만들었을까?” 조리사가 일하는 “주방 너머의 세계”는 무척 흥미로운 공간이다. 조리역사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역시 레시피를 유물이다. 셰프가 즐겨 본 책, 사용한 칼, 국제대회에서 받은 금메달과 은메달, 청와대에 출장 갔을 때 들고 간 칼세트도 볼 수 있다. 이름만 대면 한국인 모두가 알 수 있는 대기업 회장의 메뉴판은 한국 조리의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2층 전시실은 학생들이 좋아하는 공간이다. 식음료 발전사에서 커피와 와인의 발달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커피의 원재료를 만져보고 냄새를 맡아볼 수도 있다. 와인관은 호텔에서 종사했던 소믈리에들이 기증한 유물로 가득하다. 붉은색 의상이 강렬한 빛을 발하는데 한국소믈리에의 아버지로 불리는 분의 유물이란다. 한 병 가격이 1천만 원이나 되는 와인도 볼 수 있다. “이 공간은 아이들이 가장 재미있어하는 공간이에요. 술은 몰래 마셔야 더욱 맛있기 때문일까요? 하하, 고1들이 많이 오는데, 제발 술은 2년 기다렸다 성인이 되면 마시라고 권하죠.” 대통령은 만찬 때 어떤 음식을 먹을까. 그런 궁금함을 풀어주는 공간도 있다.
“이것은 유명 셰프들의 비망록입니다. 생존했을 때는 동료들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자신만의 비밀기록이지만 이제는 누구나 볼 수가 있습니다. 엄청난 량의 레시피 노트가 우리 박물관의 자랑입니다. 메뉴판은 작품이나 다름없습니다. 요리는 먹으면 사라지지만 메뉴판은 남아 있거든요.”
조리도구는 어떻게 진화해 왔을까? 프랑스에서 개발한 압력밥솥은 조리도구의 진화를 웅변해주는 흥미로운 유물이다. 엄청난 크기의 채칼도 있다. 주름이 가득한 조리사의 모자가 있다. 주름의 숫자가 계란을 사용할 수 있는 개수를 나타낸다는 사실도 재미있다. 역시 가장 주목되는 곳은 한국조리박물관의 탄생의 계기가 된 프랑스의 위대한 조리사 조르주 오귀스트 에스코피에의 오븐을 재현한 공간이다. 배 학예사가 재미있는 일화를 들려준다. “개관했을 때 프랑스에서 우리 것을 모방한 것이 아니냐며 항의를 들었다고 해요. 그러나 사실 이곳이 처음이거든요. 사실을 알게 된 프랑스와 지금은 긴밀하게 교류하고 있으니 최 관장님의 높은 안목에 경탄하게 됩니다.” 프랑스의 요리 수준을 한 단계 올린 인물의 모습이 궁금했는데, 배 학예사가 여러 사람과 찍은 흑백사진을 가리킨다. “에스코피에란 분은 키가 매우 아담한 분이셨어요.”
유기로 유명한 안성은 대장간이 유명하다. 한국의 조리도구는 대장간에서 만들어졌다. 숭례문 복원할 때 못을 만든 장인이 기증한 칼은 세계적으로 한류를 일으킨 드라마 ‘대장금’에서 사용했던 칼이다.
■조리계의 원로와 명인이 힘을 더하여 더욱 빛나는 명품박물관
음식의 재료와 어우러져 맛, 향기, 영양, 색감을 더하고 식욕을 촉진 시키기 위해 사용되는 향신료와 소스를 이해하는 것은 조리사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오감을 자극하는 각종 향신료의 기능과 형태를 관찰하며, 동서양 음식의 풍미를 더 해주는 소스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다.
박물관의 최고 자랑은 ‘자문위원회’이다. 한국 조리분야를 대표하는 한식, 양식, 중식, 일식 제과분야 원로 및 명장으로 구성된 46인의 자문위원은 박물관 설립에 뜻을 같이하고 소장품 기증은 물론 박물관 운영 전반과 향후 박물관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 자문과 정책제안을 해주고 있다.
한국조리박물관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개관한 조리박물관답게 흥미로운 유물과 풍성한 이야기를 간직한 박물관이다. 앞으로 요리를 희망하는 학생이나 현재 관련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은 물론 요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은 찾아봐야 할 명품박물관이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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