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2. 여주 여성생활사박물관

옛 여성들 생활상 간직한 ‘타임캡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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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무늬로 장식된 베갯잇. 윤원규기자

여주 ‘강천(康川)’은 이름처럼 남한강을 오르내리던 배들이 편히 쉬어 가던 마을이었다. 남한강 복판에 길게 누운 강천섬은 벗이나 가족과 소풍 가기에 썩 좋은 섬이다. 강천섬으로 이어지는 강천로를 따라 가다보면 1971년 개교해 1999년에 문을 닫은 강천초등학교 강남분교터에 자리한 여성생활사박물관(관장 이민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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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시 강천면에 위치한 여주여성생활사박물관은 2001년 강천초등학교 강남분교 자리에 설립, 여성 생활에 사용된 용품등이 전시되고 있다. 박물관 전경. 윤원규기자

■ 대를 이어 전해져야할 겨레의 살림살이

여성생활사박물관은 천연염색가 이민정씨가 30년 동안 수집한 여성생활과 관련된 유물 3천여점을 바탕으로 2001년 6월에 개관한 전문박물관이다. 이민정 관장은 ‘외국인 친구들이 자기네 전통 유물을 소중하게 주고받는 모습에 감동을 받고’ 한국의 옛 여성들의 손때가 묻은 유물들을 하나둘 모으기 시작한다. 그가 수집한 유물 중에는 한국전쟁 때 일본인이 가져간 것을 도로 받아온 것도 있다. 사재를 털어 박물관을 세운 이 관장은 “30여 년간 모은 유물들이 내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고 고백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를 다음 세대에게 오롯이 전달해 주고 싶은 것이 그의 바람이다.

가을빛이 가득한 박물관에서 돌사람(석인)과 만난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아래로 크고 작은 장독들이 옹기종기 놓인 풍경이 고향집처럼 아늑하다. 박물관 벽면에 걸린 황토빛깔의 커다란 천에 새겨진 혜원 신윤복의 뱃놀이 그림과 ‘예술혼의 이음’이란 글이 눈에 들어온다. 10월1일에 시작된 2022 지역문화예술 플랫폼 육성사업 ‘예술혼의 이음’은 11월 30일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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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구조를 유지하고 있어 복도를 거닐며 다양한 전시물을 만날 수 있다. 윤원규기자

■ 예술가 두 가문을 만나는 ‘예술혼의 이음’

전소빈 학예실장은 ‘예술혼의 이음’전을 “문화의 지속성과 영속성에 대한 관심과 탐구에서 출발한 것”이라 밝힌다. 조선후기 단원 김홍도와 함께 활약한 혜원 신윤복(1758~?)의 증조부 신세담 역시 도화서 화원으로 ‘십로계첩(十老契帖)’을 남긴 신말주(1429~1503, 신숙주의 아우)의 8대손이다. 신윤복과 부친 신한평, 조부 신일흥, 증조부 신세담까지 4대에 걸쳐 화맥이 이어졌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보여준다. 아들과 딸을 돌보며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여인을 그린 ‘자모육아도’는 신한평의 풍속화 기법이 혜원과 단원에게 영향을 끼쳤음을 짐작케 하는 작품이다. ‘쌍검대무’를 비롯한 유명 작품으로 가득한 신윤복의 ‘혜원전신첩’을 찬찬히 살펴보며 과거로의 여행에 들어간다. 고령신씨 집안의 유물인 ‘설씨부인 권문세첩’(보몰 제728호)과 신말주의 ‘십로계첩’(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42호)은 조선 초 양반 문화를 살필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신말주를 비롯한 열 명의 인물들의 초상과 인물을 소개한 7언으로 된 시가 무척 재미있다. 옛사람들의 풍류가 물씬 풍겨난다. 여암 신경준(1712~1781)이 제작한 고지도 역시 예사롭지 않다. 18세기의 강화도를 그린 ‘강화 이북 해역도’와 압록강과 두만강, 백두산 일대를 세밀하게 그린 ‘북방강역도’는 당시 지도 제작의 수준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방안처럼 꾸며진 전시실에서 남종화의 대가 소치 허련(1809~1892)의 작품을 만난다. 대흥사 주지 초의선사가 허련에게 고산 윤선도 일가와 연을 맺게 하여 ‘공재화첩’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하도록 하고, 추사 김정희를 소개시켜준 사실이 흥미롭다. 소치 허련家의 이음은 아들 미산 허형, 손자 남농 허건, 종손 의재 허백련으로 면면히 계승되어 한국 화단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신윤복 가와 허련 가의 대를 잇는 예술혼과 한국의 미, 풍속화와 남종화에 대한 고찰, 전통 회화의 실체들을 두루 살펴보는 특별한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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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1층 기획전시실에서는 혜원 신윤복,소치 허련 등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예술혼의 이음’ 전시가 열리고 있다. 신윤복의 작품들. 윤원규기자

■ 선조들의 생활과 살림의 지혜를 한눈에

여성생활사박물관은 옛 여성들의 생활 모습을 두루 만날 수 있는 것이 강점이다. 지금과 달리 전통시대의 여성은 육아를 비롯해 실을 뽑고 베를 짜서 염색을 해 옷을 만들고, 텃밭에 채소를 길러 음식을 만드는 등 가족공동체를 꾸려나가는 존재였다. 살림에서 여성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따라서 전시된 유물들은 대부분 여성들의 손때가 묻고 한숨이 배어든 것들이다. 복도를 지나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오르면 더욱 다양하고 흥미로운 유물들과 만날 수 있다. 옛 사람들의 손길이 느껴지는 유물은 복도 좌우 벽면까지 가득 채우고 있다. 전시실에서 만난 물레와 베틀은 옛 여인들의 고단한 일상을 보여주는 유물이기에 더욱 애틋하다. 옷을 넣었던 반닫이와 삼층장, 방안을 밝히던 등잔, 시집 갈 때 타고 가는 가마, 방안의 필수품이던 요강단지, 바느질할 때 손가락을 보호한 골무, 머리에 꽂는 비녀와 머리를 장식하는 화잠과 화관, 옷을 다리는 다리미의 종류가 이렇게 많았다는 사실에 놀란다. 처녀와 총각들의 필수품이던 댕기, 도포를 여며주는 매듭, 되나 말로 곡식을 퍼 담던 용기, 1970년대까지 밥상에 올랐던 놋쇠그릇, 옛날 화장대, 옷을 펴기 위해 여인이 밤새 두드리던 방망이, 비옷인 도롱이, 사대부 여인들이 신었던 가죽신 운혜, 가오리가죽으로 만든 안경집까지 정말 너무나 다양한 물건들이 전시실을 채우고 있다.

■ 전통으로 부활해야 할 특별전 ‘왕후를 만나다’

아름다운 남한강과 비옥한 들판을 품은 여주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아홉 명의 왕후를 배출한 명문가의 고장이다. 이처럼 특별한 역사에 기반으로 두고 박물관에서 기획한 것이 ‘왕후를 만나다’이다. 여주시의 후원과 대한황실문화원과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의 전시지원을 받는 행사로 자리 잡았다. ‘왕후를 만나다’ 특별전은 전시와 참여, 공연과 체험이 어우러진 복합 문화프로그램으로 인기가 많았다. 조선시대 세자빈 책봉식’을 주제로 기념식과 한복패션쇼를 진행하기도 했다. 2018년 11월부터 2019년 1월까지 열린 ‘제7회 왕후를 만나다’는 조선시대 위엄과 품격으로 국모의 자리를 지켰던 왕비들의 삶의 외연과 그 뒤에 숨겨진 인간적인 고통 희생 등을 재조명한 기획으로 주목을 받았다. 왕비들의 삶과 관련한 자료와 여러 가지 궁중의복과 비녀 노리개 등의 귀중품과 일반 여인들의 사용하던 평상복, 각종 치장품의 전시전과 왕후 선발, 가례 재현이 이루어졌다. 2019년 7회까지 꾸준하게 이어지던 ‘왕후를 만나다’ 특별전은 2020년에 코로나19라는 복병을 만나면서 ‘이음’이 끊어진다. 이경철 부관장은 여러 차례 행정의 아쉬움을 토로한다. “한번 지원이 끊어지니 시에서 다시 예산을 세우기가 어렵다고 하네요. 아홉 분의 왕비를 배출한 여주시를 널리 알리는 이런 행사는 마땅히 부활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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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은 채현천연염색연구소도 겸하고 있다. 1층 전통염색 전시실에 전시된 다양한 염색된 천들. 윤원규기자

■ 남한강에서 만난, 우리 아낙네들의 역사

여성생활사박물관은 개관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주제의 전시로 관람객과 만났다. 2014년 경기도박물관 미술관지원 사업으로 연 특별기획전 ‘여인의 향기, 불꽃처럼 바람처럼’, 2015년 특별기획전 ‘삼굿’과 2016년의 ‘청사초롱 불 밝히고’, 2017년의 ‘수미전’과 2018년의 ‘꽃버선 신고 때때옷 입고’와 2019년의 ‘초록바람전’ 역시 전통문화의 멋과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풍성한 자리였다. 2020년 특별기획전 ‘물 빛 바람의 노래’는 천연염색의 아름다움과 실용성 및 미술작품으로 발전 가능한 염색의 미래 가치를 두루 감상하고 직접 체험해보는 기회였다. 2021년 ‘추모와 기억-조사(弔辭)’는 생명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족관계라는 틀 안으로 귀속되는데, 죽어서도 지속되는 영속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한글로 쓴 제문을 비롯한 유물들을 통해 살펴본 기획이다.

이제 22살 청년으로 성장한 여성생활사박물관은 한때 폐관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사립박물관은 국공립 박물관과는 달리 시설 개선에 투자를 하기도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박물관 관계자들은 “현재는 물론 다음 세대를 위해서라도 여성생활사박물관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저 유구한 남한강의 물줄기처럼 끈질긴 생명력으로 우리 역사를 지탱해온 여성들의 숨결과 향기를 간직한 유물은 후손들이 지켜내야 할 자존심이다.

김준영(다사리행복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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