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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이슈] 잊혀지는 ‘근대문화유산’... 지역이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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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이슈] 잊혀지는 ‘근대문화유산’... 지역이 기억하자

가치있는 ‘문화유산’ 개발로 훼손... 지자체, 보존·기록 움직임 확산
일제강점기 만든 임진강 철교 등 파주시, 8곳 미래유산으로 선정
평택도 근대기 건물 ‘표석’ 설치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지만 가치 있는 근대문화유산를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들 근대문화유산은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탓에 각종 개발 등으로 사라질 위기를 맞고 있으나 아직까지 정확한 통계조차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가운데 50년이 지나지 않았거나 터만 남아있는 등 문화재 지정이 어려운 문화유산을 지역사회의 소중한 일부로 보존·기록하려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편집자주

 

8일 오전 10시께 임진강역 앞에서부터 500m를 달려 도착한 파주시 문산읍 임진각. 임진각 전망대에 오르니 임진강(경의선) 철교를 ‘파주 미래유산(PAJU FUTURE HERITAGE)’이라고 소개하는 동판이 시선을 끈다. 동판 너머로는 자유교(하행선)와 6·25전쟁의 비극을 증언이라도 하듯 파괴된 채 교각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독개다리(상행선)가 선명하게 펼쳐졌다.

임진강 철교는 파주시 문산읍과 장단면을 연결하는 복선 철교로 일제강점기 당시 군수물자 및 병력 수송을 목적으로 가설됐다. 6·25전쟁 중 폭격으로 파괴되면서 교각만 남아 전쟁의 상흔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파주시 교하동 교하초등학교. 교문 옆에 붙은 ‘파주미래유산’ 동판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학교 내에는 ‘파주 교하 3·1 독립운동 기념비’가 있다. 교하초교는 지난 1919년 3월10일 독립운동가 ‘임명애’를 중심으로 시민의 만세 함성이 울려 퍼진 역사적 장소다.

파주시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될 만한 가치를 지닌 근대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자 지난해 10월 ‘미래유산 조례’를 제정하고 임진강 철교, 교하초교, 금촌통일시장 등 8곳을 파주미래유산으로 선정했다.

평택시 평택역 2번 출구를 나서 공영주차장으로 향하는 길목 보도에 동판으로 만들어진 ‘평택역 터’ 표석이 설치돼 있다. 공영주차장 울타리엔 일제강점기 평택역 인근을 찍은 사진과 함께 근대기 주요 건물 20여곳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가 걸렸다.

지도를 보고 맞은편 골목으로 향하자 1907~1953년 존속한 평택우편소터와 설명을 담은 표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옆 골목엔 이곳이 본정통(혼마치)이었고, 사카이상점과 오카다상점 등 일본인 가게가 있다는 설명이 담긴 표석이 보도에 박혀 있었다.

이들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건설됐으나 6·25전쟁 당시 두 차례 폭격으로 원평동 일대가 파괴되면서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이후 향토사학자, 주민, 원평동이 지역의 역사성을 되찾자는 취지로 뜻을 모아 지난 2020년부터 건물이 위치했던 터를 조사해 표석을 설치 중이다. 올해 표석 6개를 추가 설치하면 군청, 금융조합, 곡물검사소 등 총 20곳의 터가 확인된다.

장일현 평택시 문화예술과장은 “올해 말까지 역사문화자원 전수조사 용역을 마치고 비지정 문화재를 목록화한 뒤 관리 방안 등을 수립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박환 수원대 사학과 교수는 “6·25전쟁 이후 근대문화유산은 정확한 통계도 없고 개발로 사라질 수 있다”며 “지자체별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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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로 지정받지 못한 채 잊혀져 가는 도내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보존·기록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사진은 파주미래유산으로 선정된 임진강 철교(왼쪽)와 근대기 평택의 중심지였던 원평동의 모습이 기록된 공영주차장 울타리. 윤원규기자

“보존 가치 있는 비지정문화재... 현황조차 파악 안돼”

학술적·사료적 가치는 부족하더라도 주민의 삶에 영향을 미쳤거나 지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문화유산을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경기도에 따르면 지난 6월 기준 도내 국가지정문화재는 416개, 등록문화재 등 도지정문화재는 1천216개다. 문화재는 보존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으로 문화재보호법 또는 문화재보호조례에 따라 보호된다.

반면 지방자치단체별로 지정하는 향토문화재를 제외하면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비지정문화재’는 현황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 특히 1970년대 이후 터만 남아 있거나 제작, 생성, 건립한 현대유산 등은 별도로 관리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 근대문화유산은 개발 등으로 헐리거나 기존 문화유산 위에 새 건물이 들어서면 표석 등으로 흔적을 남기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박영선 경기도 문화유산정책팀장은 “비지정문화재는 도에선 따로 관리하지 않고 있어 각 시·군에서 관리하지 않으면 정확한 개수도 파악하기 어렵다”며 “향후 관리 방안이나 계획도 아직 정해진 것은 없다”고 말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지자체별로 과거 문화유산을 지키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는 것은 다행이다. 미래유산제도는 이 같은 노력 가운데 하나다. 미래유산은 지역사적으로 주민들에게 유의미한 사건, 인물, 이야기 등이 담긴 유·무형 자산이 대상이다. 미래에 문화재로 등재할 수 있는 문화유산의 가치를 보존하고 지역민의 집단기억과 감성을 보존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지난 2012년 서울시를 시작으로 전주시 등에서 도입, 관련 조례를 제정해 미래유산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현재 도내에선 파주시가 지난 2018년 ‘미래유산 보존·관리 및 활용에 관한 조례’를 제정해 운용 중이다. 다만 미래유산은 법적 구속력이 없어 소유주 등에 의한 멸실, 훼손 우려 또한 여전히 상존한다. 이와 관련해 문화재청에선 이런 사각지대를 막기 위해 지난 1962년 제정된 후 60년 동안 이어진 ‘문화재보호법’ 대신 ‘국가유산기본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법이 개정되면 ‘문화재’란 명칭은 ‘문화유산’으로 변경되고 비지정문화재와 미래유산 등을 포함한 포괄적 보호 체계가 구축된다. 또 각 지자체에 문화재 전문인력을 의무적으로 배치하는 방안도 마련된다.

변지현 문화재청 법무감사 담당관은 “현재 비지정문화재에 대해 목록유산이라는 개념 신설로 법적 근거를 마련할 수 있는 국가유산기본법 제정안을 마련 중”이라며 “비지정문화재는 ‘문화재보호법’에서도 다루고 있었으나 지정문화재 중심이었기 때문에 체계를 넓히고 보호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돼 관리 및 보호하는 데 획기적인 방안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강조했다.


전문가 제언 “지자체, 문화재 등록... 철저한 관리를”

문화재 전문가들은 미래유산과 비지정문화재도 문화재와 마찬가지로 법적 테두리 안에서 관리감독이 이뤄지는 동시에 지자체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현행법상 문화재로 등록이 어려운 경우라도 역사적 보존 가치가 있으면 지자체가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환 수원대 사학과 교수는 “지자체가 근현대유산에 대한 실태조사를 진행한 뒤 결과를 바탕으로 등급제를 도입해 분류, 보존 가치가 있으면 문화재로 등록해 철저히 관리해야 한다”며 “50년이 되지 않은 건물도 역사적 보존 가치가 있으면 지자체는 대책을 수립해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터만 남았을 경우 주변 환경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표지석을 설치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며 “사진, 3차원(3D) 모델을 이용한 건축물 모습도 함께 설치하면 오랫동안 지역민의 기억에 남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역 시민사회의 역할도 중요하다는 주장도 나왔다. 시민단체가 함께 현장 관리와 인식 개선 등을 한다면 지자체의 관리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문화재정책학을 전공한 류호철 안양대 교양대학 교수는 “지역 내 민간단체 또는 시민사회와 함께 시민들이 문화유산의 보존 가치를 인식할 수 있도록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며 “문화재 지킴이 등 문화재 보호 관련 단체를 조직하는 등 지자체와 지역 민간단체가 협력해 현장을 관리할 수 있는 체계를 확립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법 테두리 밖에 있는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안전 문제도 지적됐다. 적절한 관리 없이 장기간 방치될 경우 화재 등의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김상식 우석대 소방행정학과 교수는 “구도심, 낙후된 지역, 오래된 건축물엔 각종 쓰레기와 부실한 관리로 화재 위험성이 잠재해 있다”며 “문화재로 지정되는 등 조치가 이뤄져야 예산을 지원받아 화재감지기, 소화기 등을 설치해 화재 위험에 대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언했다.

로컬이슈팀=김경수·박용규·안노연·이대현·김기현·안치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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