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눈은 도리도리, 앞다리는 짤막, 뒷다리는 길쭉, 두 귀는 쫑긋하여 완연한 산토끼였다.”
조선 후기 판소리계 소설 ‘토끼전’의 한 대목이다. 토끼의 큰 두 눈은 광각렌즈와 같이 넓은 범위를 감시할 수 있다. 짧은 앞다리에 비해 길고 근육이 발달한 뒷다리는 토끼에게 순간적인 도약력을 선물해 줬다. 도망감을 속되게 이르는 ‘토끼다’라는 말은 바로 이 토끼의 뒷다리 힘에 의한 빠른 기동력에서 유래했다. 뾰족 서 있는 두 귀는 주변 소리를 잘 들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달리며 데워진 체온을 식히기 쉬운 구조다. 과연 우리 조상들은 핍진한 묘사로 토끼의 생리적 특징을 완벽하게 노래했다.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멧토끼는 토끼목 토낏과에 속하는 포유동물로 전 세계에서 한반도에만 서식하는 고유종이다.
멧토끼의 학명(Lepus coreanus)에도 당당하게 코리아가 붙었다. 헐벗고 굶주리던 시절 산과 들에 흔했던 멧토끼는 사람들의 주요한 사냥감이기도 했다. 겨울철 농한기면 마을 아이들이 조직적으로 토끼몰이 사냥에 나섰다. 철사가 보급되고 나서는 토끼가 다니는 길목에 올무를 놓아 잡았다. 고기는 먹고 가죽으로는 목도리, 귀마개며 장갑을 만들어 썼다. 이처럼 생활밀착형 동물이다 보니 산에 사는 멧토끼는 각종 동요와 설화에 단골 주인공으로 출현하며 문화적, 정서적으로 친숙한 동물이 됐다.
하지만 요즘엔 멧토끼가 좀처럼 잘 보이지 않는다. 센서카메라를 활용한 정밀조사에서도 멧토끼의 출현 빈도는 떨어진다. 흔한 야생동물의 대명사였던 토끼가 귀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지만 가장 큰 원인은 서식지 변화다. 초식동물인 멧토끼가 좋아하는 먹이는 풀과 나무 줄기이며, 서식지로는 초지와 관목지대를 선호한다. 한편 우리나라 산림은 난방 연료 변화와 녹화사업에 힘입어 반세기 만에 울창해졌다. 이러한 서식지 조건의 변화로 멧토끼가 설 자리는 점차 감소했다. 그나마 넓은 초지가 펼쳐져 있는 시화호 인근과 지리산 노고단 등지에 가면 멧토끼 서식 흔적을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다.
한편 유럽이 고향인 집토끼는 구한말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집토끼는 이베리아반도에 사는 굴토끼(Oryctoiagus Cuniculus)를 가축화한 종이다. 분류학적으로 멧토끼와는 속(屬)이 다르며 생태적 특성도 차이가 난다. 집단생활을 하는 집토끼(Rabbit)와 달리 멧토끼(Hare)는 단독으로 활동한다. 집토끼는 굴을 잘 파고 그 속에서 새끼를 낳고 키운다. 새끼는 벌거숭이에다 눈을 뜨지 못한 상태로 태어난다. 이에 반해 멧토끼는 굴을 파지 않고, 새끼는 털북숭이에 눈을 뜬 채 태어나 바로 활동한다.
1990년대 이후엔 집토끼를 육종한 다수 품종의 토끼가 수입되면서 우리나라에 애완토끼 기르기 붐이 일어났다. 귀엽고 온순한 이미지를 가진 덕에 애완토끼의 인기는 높았다. 하지만 치명적인 귀여움과는 별개로 애완토끼 키우기는 만만치 않다. 체온 조절 능력이 약해 적절한 온습도 관리가 필수적이며, 발바닥 패드가 없기에 바닥은 반드시 푹신한 재질로 마련해야 한다. 이가 평생 자라기에 이갈이를 도와줄 질긴 건초를 수시로 챙겨 줘야 하며, 자주 빠지는 수북한 털을 감당해야 한다.
토끼 기르기 난이도에 절망한 몇몇 이들은 토끼에게 자유를 허한다. “그래 원래 얘들이 살았던 숲에서 마음껏 다니도록 풀어주는 거야”라며 죄책감을 덜어낸 이들은 토끼를 공원에 버린다. 하지만 애완토끼는 품종 개량으로 만들어져 야생에서의 생존능력을 갖추지 못한 존재다. 천적과 굶주림, 추위에 노출된 토끼의 최후는 대개 비참하다. 착각과 무지에 의해 낮아진 도덕적 장벽은 토끼를 죽음으로 내몬다.
멧토끼, 집토끼, 애완토끼. 이처럼 각자 삶의 무게를 진 토끼들의 운명은 우리 인간에 의해 많은 부침을 겪었다. 토끼에 대한 진실을 직시하는 것에서부터 토끼와의 공존은 가능할지 모른다. 이제 곧 정월대보름 둥근 달이 차오를 테다. 지금껏 달에게 각자의 소원을 빌었다면 이번 계묘년 보름달 옥토끼를 보면서는 한 번쯤 토끼들의 안녕을 빌어 주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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