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대표적 사회 문제 중 하나가 교육이라는 것에는 대체로 동의하는 것이 현실이다.
교육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조선시대는 유교 교육과 함께한 500년이었다. 유교 교육은 신분사회체제를 유지하고 지배계급 지향을 통해 국가체제를 보호하는 기능에 충실히 기여했다. 이후 인간 평등사상에 근거한 교육의 기회 균등을 지향하는 실학자들이 등장했으나 큰 변화를 이뤄내지 못했다. 실천적 교육 변화의 시작은 1876년 부산항 개항 이후 빠르게 전파되는 서양문물과 함께 시작됐다. 특히 사회적 계급을 구별하지 않고 신교육을 실시한 선교계 사립학교들의 교육적 성과는 교육 근대화 정책 수립의 마중물이 됐다. 그리고 1895년 고종은 ‘교육입국조서’를 발표해 근대교육의 중요성을 국민들에게 강조하고 근대식 학제 성립의 토대를 마련했다.
근대적 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과 역할은 정부보다 민간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나타났다. 1883년 함경남도 원산에서는 근대 문물을 교육하기 위해 ‘교영재(원산학사)’라는 교육기관을 지방관료와 주민들이 합심해 설립했다. 이는 1886년 최초의 관립학교인 ‘육영학원’에 비해 3년이나 앞선 최초의 사립학교 설립이었다. 이후 1910년경까지는 선교사들이 설립한 기독교계 796개교를 포함해 민간 사립학교가 3천여개에 달할 정도였다 하니 예나 지금이나 교육에 대한 관심과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백성들에게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용인지역에도 지금의 처인구 양지면에 주민들이 합심해 1908년 용인 최초의 근대적 학교를 설립했다. 추계(秋溪)와 양지(陽智)라는 지명의 첫 글자를 딴 ‘추양(秋陽)’과 의연금(義捐金)을 모아 설립한 교육기관이라는 의미의 ‘의숙(義塾)’이 합해져 ‘추양의숙’이라는 사립학교였다. 이후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사립학교들에 대한 장악을 위해 조선통감부는 1908년 ‘사립학교령’을 공포한다. 1910년 출범한 조선총독부는 1911년 8월, 제1차 조선교육령 공포를 통해 보통 수준의 지식과 기술 그리고 국어(일본어) 교육 실시를 위해 보통학교를 운영하게 된다. 추양의숙 역시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 1911년 9월1일 4년제 양지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해 제1회 졸업생 15명을 배출했다. 이러한 민초들의 설립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학교가 바로 현재 용인시 양지면에 소재하고 있는 양지초등학교다.
용인 근대교육의 시작점인 1908년은 경기도에서 가장 오랜 역사의 수원 신풍초등학교(1896년·구 수원군 공립소학교)에 비해서는 출발이 조금 늦다. 하지만 신풍초등학교는 1895년 공포된 ‘소학교령’에 근거해 설립된 공립의 성격이었다면 양지초등학교는 설립의 모태가 지역주민들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할 것이다.
용인특례시는 1996년 시 승격 이래 많은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 왔다. 특히 민선 8기 이상일 시장은 ‘용인 르네상스’를 지향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도시 부흥의 토대를 구축해 오고 있다. 반도체로 대표되는 ‘테크도시’,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지는 ‘문화도시’, 경강선 연장을 통한 ‘교통도시’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함께 추진하는 중요한 과제 중 하나가 바로 ‘교육도시’ 구축이다. 전통적 교육의 틀을 깨고 근대 문물교육을 위해 근대교육이 탄생한 것처럼 인공지능(AI)으로부터 환경 위기까지 현 시대가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여건에 부흥하는 새로운 교육도시 모델을 추진하고 있다.
추진의 바탕에는 1908년 용인 근대교육의 시작이 주민들의 자발적 노력과 함께한 것처럼 용인 르네상스 역시 그 주인공은 바로 지역주민이라는 믿음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100년 이상 된 근대교육기관이 5개교나 존재하는 용인은 과거부터 도시 역량 측면에서 이미 잠재력을 내재하고 있는 도시로 인정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15년 전 근대교육도시가 되기 위해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있었던 것처럼 오늘의 용인특례시 역시 주민과 함께 놓인 환경을 주도하고 우리의 삶을 책임질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교육도시’가 되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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