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9.파주 한길책박물관

1976년 문 연 책 전문 박물관... 고흐가 사랑한 책 한눈에 볼 수 있는 특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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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가 사랑한 책' 전시에서 고흐의 작품 '아를의 침실'에 들어가보자. 윤원규기자

 

“‘나나’도 읽었다. 테오야, 졸라는 확실히 제2의 발자크라 할 수 있지.”

 

1882년 7월23일, 빈센트 반 고흐가 아우 테오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그림에 미친 화가 반 고흐는 독서광이었다. “나는 책에 대한 열정을 억누를 수 없어. 마치 성장하기 위해 빵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공부를 통해 나를 향상시키고 싶어.” 독서의 유용함을 잘 알고 있었던 고흐는 이렇게 주장한다. “사람은 책 읽는 법을 배워야 한다. 보는 법을 배우고 사는 법을 배워야 하듯 말이다.” 독서에 대한 열망은 그림으로 옮아간다. 19세기 프랑스의 유명한 화가 귀스타브 도레의 판화를 보고 크게 감동한 고흐는 벗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요전날 런던을 묘사한 도레의 작품을 전부 훑어봤지. 아, 그의 그림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고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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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의 1890년 '운동하는 죄수들' 작품. 윤원규기자

■ 독서광 반 고흐의 편지와 아름다운 책 그림을 만나다

 

파주시 탄현면 헤이리에 위치한 한길책박물관(관장 김언호 박관순)은 1976년 창립해 인문학 출판을 선도한 한길사 김언호 대표가 설립한 책 전문 박물관이다. 현재 이곳에서 ‘고흐가 사랑한 책’ 전시가 열리고 있다. 2023 경기도 박물관 미술관 지원사업으로 열리는 특별전이다. 고흐의 편지를 읽다 보면 그의 그림만큼이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을 느끼게 된다. 박물관 전시실을 둘러보면서 그 비결이 바로 독서라는 것을 확인한다. 반 고흐는 편지에 셰익스피어, 귀스타브 도레, 가바르니, 찰스 디킨스 등 여러 작가의 책을 읽으며 느꼈던 감정과 소감을 생생하게 표현한다.

 

고흐를 만나기 위해 지하 전시실로 향한다. 유리창을 통해 푸른 나무가 보이는 창이 보여 환하다. 전시실 입구에 걸린 고흐의 그림을 살펴본다. 무릎 위에 두꺼운 책을 펼쳐 놓고 왼손으로 턱을 괸 ‘아를의 여인’은 무슨 책을 읽다가 감동한 것일까? 생각에 잠긴 여인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고흐가 자신이 그림에 책을 그려 넣은 10여점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고흐의 예술세계로 빠져든다. 전시실 모퉁이에 아늑하고 멋진 공간이 마련돼 있다. 그림으로 친숙한 ‘아를의 침실’을 재현한 체험 공간이다. “반 고흐는 아를의 침실이란 이름으로 세 작품을 그렸습니다. 이 가운데 세 번째 작품은 자신의 어머니와 여동생을 위해 그린 것이지요. 세 작품 이외에 고갱과 아우 테오에게 쓴 두 편의 편지에도 ‘아를의 침실’ 스케치가 들어 있어요. 관람객 중에는 침대에 누워보는 분도 있습니다.” 반 고흐는 생전에 똑같은 그림을 다섯 번이나 그린다. 1888년 그린 ‘아를의 침실’은 고흐에게 위로와 충전과 평안함을 선사한 둥지였다. 이유신 학예연구사의 설명을 들으며 침실에 들어선다. 아를 침실은 기념사진을 찍기에 아주 훌륭하다.

 

꽃과 나무와 잎, 새 등 자연의 아름다운 생명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만든 우아한 장식이 여러 점 전시됐다. 시인, 사회 운동가, 출판사 운영 등 다양한 분야에 많은 활동을 해 ‘토털 아티스트’라 불린 윌리엄 모리스가 1861년 완성한 실내 장식이다. 윌리엄 모리스는 19세기 후반 영국에서 일어난 공예 운동 ‘아트 앤드 크래프트’(미술공예운동)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그는 켈름스콧 프레스(Kelmscott Press)를 설립해 출판을 예술로 승화시킨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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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아트로 유명한 앤디 워홀이 상업작가로 활발히 활동한 1949년부터 1964년까지 책, 잡지 등의 작업이 전시되고 있는'YOUUNG ANDY WARHOL'. 윤원규기자

 

■ 대중 잡지와 레코드판에 담긴 앤디 워홀의 열정

 

고흐도 사랑했던 귀스타브 도레의 판화가 실린 희귀한 고서를 소장한 한길책박물관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19세기 유럽에서 출판된 아름다운 고서들을 비롯해 일러스트 잡지, 소설 ‘돈키호테’에 들어간 판화 등 희귀 자료가 무려 2만여점이나 소장됐다. 이 중 가장 소중한 유물은 무엇일까?

 

“애서가이던 윌리엄 모리스가 가장 존경한 영국 시인 제프리 초서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함께 영문학의 아버지로 불리지요. 모리스는 자신이 설립한 켈름스콧 출판사에서 총 53종 66권의 책을 출판합니다. 이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책이 1896년에 출판 ‘초서 저작집’입니다. 이 책은 ‘켈즈의 서’와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와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3대 책으로 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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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의 다양한 팝아트 전시도 만나볼 수 있다. 윤원규기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앞에 선다. 양가죽으로 만든 장정과 본문에 공들여 새긴 그림과 활자에서도 품격이 묻어 난다. 윌리엄 모리스는 켈름스콧 인쇄와 서적 디자인도 크게 발전시킨다. 켈름스콧 출판사에서 제작한 53종 66권의 책 전질을 보유한 기관이나 컬렉터는 세계에서도 매우 희귀한 형편이다. 일본이나 중국의 애서가들도 초서저작집을 비롯한 켈름스콧에서 출판된 책을 보기 위해 한길책박물관을 찾아온다고 한다. 이처럼 한길책박물관은 아름다운 책, 귀중한 고서를 소장한 곳으로 유명하다. 이런 곳에서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을 만나게 될 줄이야!

 

20세기의 가장 영향력이 있는 미술가로 평가받는 앤디 워홀은 책과 어떤 인연을 맺었을까? 1층 전시실부터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의 예술세계가 펼쳐진다.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앤디 워홀의 젊은 시절의 작품세계 전모를 살펴볼 수 있는 전시입니다. 앤디 워홀이 상업작가로 활발히 활동한 1949년에서 1964년 사이 다양한 작업으로 책과 잡지 일러스트, 그리고 LP 커버를 소개하고 있지요.” 전시실에 들어서자 1960년 유행했던 팝송이 귀를 즐겁게 한다. 자유와 변화의 열기로 충만했던 1960년대 활력이 가슴을 두드린다. 이처럼 다양하고 풍부한 자료를 누가 어떻게 수집했을까? “‘영 앤디 워홀’은 남다른 안목으로 귀한 자료를 모은 컬렉터 이돈수가 존재했기에 가능한 전시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에스콰이어’를 비롯한 대중 잡지에서도 앤디 워홀의 이름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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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헤이리마을에 위치한 한길책박물관은 한길사가 출판문화공간으로 1976년 창립, 운영되고 있다. 박물관 전경. 윤원규기자

 

■ 책은 미래를 여는 상상력의 창고

 

한길책박물관은 책과 멀어진 현대인들의 마음을 움직여 다시 책과 가까워지게 해 주는 공간이다. 1970년대부터 인문·예술학 출판을 선도해온 한길사 대표 김언호 관장은 아름다운 책 수집가로도 유명하다. 책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부터 ‘아름다운’ 책에 관심이 많았던 김 관장은 소년 시절 화가를 꿈꾸었을 정도로 미술에 소질이 있었다고 한다.

 

고서는 한 시대의 정신과 사상을 보여주는 문화재다. 김 관장은 유럽의 책방을 순례하면서 운명처럼 19세기 영국의 예술가이자 위대한 출판인인 윌리엄 모리스(1834~1896)와 만난다. 모리스는 출판인 김 관장의 영원한 스승이다. 아름다운 책을 출판하기 위한 모리스의 정성과 열정을 박물관에서 확인한다. 모리스는 여러 가지 활자체를 디자인하고 고품격 출판에 필요한 종이와 잉크를 개발한다. 나뭇잎과 꽃봉오리들이 반복 배치된 문양을 바탕으로 디자인한 서체와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그린 삽화는 여전히 매력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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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지하의 BOOK HOUSE에서는 한길사에서 발간한 책들을 구매할 수 있다. 윤원규기자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의 삽화를 그린 19세기 프랑스의 화가 귀스타브 도레(1832~1883)에 대한 김 관장의 사랑도 각별하다. 한길사는 삽화 228점을 넣은 ‘도레의 성서’의 복각판을 펴내기도 한다. 한 일간신문이 창간 70주년을 기념해 광복 이후 한국에 큰 영향을 미친 책을 선정했는데, 한길사에서 펴낸 책이 여러 권 선정됐다. 1위로 꼽힌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12위에 오른 ‘함석헌전집’은 여전히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책이야말로 미래를 창조하는 원천입니다. 영화·뮤지컬·애니메이션 등 어떤 콘텐츠든 책이 그 가운데 있습니다.” 미래학자들이 책의 소멸을 예견했으나 여전히 종이책이 중심이다. 김 관장의 생각을 들어본다. “인터넷에 들어가든지 스마트폰을 보면 웬만한 정보는 다 있습니다. 그러나 깊은 사유를 하기 위해서는 종이책을 읽어야 합니다. 좋은 책은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습니다.”

 

한길책박물관은 책방 ‘북하우스’와 연결돼 있다. 계단 없이 오르내릴 수 있는 완만한 경사길 벽면에 고객의 손길을 기다리는 책들이 가득하다. 서점에서 빈센트 반 고흐와 앤디 워홀을 다시 만난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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