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별이 된 시인 윤동주를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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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다산문화예술진흥원장

오는 30일은 윤동주 시인 탄생 106주년이다. 윤동주 시인은 사실 자유 대한민국의 보배이자 자랑이다. 그의 삶을 조명해 보면 짧은 인생은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윤동주 시인을 다시 기억하며 그의 삶으로 교훈을 얻는다.

 

첫째, 삶을 나누는 좋은 친구가 있었다. 송몽규와 문익환이다. 연희전문학교에서 일본 유학까지 같이 간 강처중도 있다. 연변 용정에서 출생해 함께 자란 친구들과 명동학교에서 수학했고, 은진중학교에 진학한 시인은 집안 어른들을 설득해 그해 여름 숭실중학교 3학년으로 편입한다. 바로 친구 문익환이 진학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옥중에까지 송몽규와 함께 저항운동을 하다 체포돼 둘 다 같은 감옥에서 옥사하게 된다. 평생을 같이하며 죽음까지 함께하는 이런 친구와 함께였다.

 

둘째, 배움의 길은 끝이 없었다. 명동학교를 거쳐 은진중학교, 숭실중학교, 광명학교, 연희전문학교를 넘어 일본 릿쿄대와 도시샤대에까지 유학하며 공부했다. 그의 삶의 여정은 배움의 길이었다. 배움을 위해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해외까지 가서 생활했다.

 

셋째, 남다른 한글 사랑이다. 시인의 한글 작품 중 눈에 띄는 것은 ‘문우(文友)’에 발표한 작품인데, 교우회 발행이 해산되는 1941년 6월 문우(文友)는 마지막 5호로 전체 내용이 거의 대부분 일문(日文)으로 쓰여 있을 정도였지만 윤동주와 송몽규, 강처중 세 친구의 시만은 끝까지 한글 작품으로 남아 있다. 그때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버티며 한글 작품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넷째, 주변에 좋은 멘토가 있었다. 김약연 목사를 비롯해 아리랑의 춘사 나윤규, 조두남, 윤극영, 이동휘 등 수많은 이들의 희생과 눈물과 기도가 그에겐 좋은 멘토였다.

 

다섯째, 불의에 도전하는 저항정신이다. 평양 숭실중학교에 와서 처음 부딪힌 것은 뜻밖의 ‘신사참배’ 강요였다. 일제는 한민족의 회유와 탄압, 말살이라는 정책으로 각지에 신사를 세우자 총독부의 강경책에 동료들과 저항하면서 큰 어려움에 직면한다. 학교도 휴교에 처하게 된다.

 

여섯째, 자기희생을 감당하는 자기성찰이다. 대표적으로 시 ‘참회’와 ‘십자가’다. 일제강점기의 ‘창씨개명’을 평생 후회하며 참회하는 자기성찰과 시대의 아픔을 타인의 문제가 아닌 자기 스스로 부끄러움을 부끄러워하고, 잘못한 것에 대한 진실한 참회는 맑은 양심의 기초가 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시인 윤동주, 그래서 더욱 빚진 심정으로 민족의 고난과 역사에 자신을 헌신했다. 시 ‘십자가’에서 나타난 것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겠다고 다짐으로 순례자의 삶을 묵묵히 살았고 수난의 가시밭길을 걸어갔다. 그리고 죽음을 맞았다.

 

일곱째, 육신으로는 죽었지만 시(詩)로 다시 부활한 ‘시 세계’다. 윤동주 시인은 옥중에서 무명한 자로 남긴, 그의 정신세계의 표현이자 삶의 고백서인 두 권의 자필 시집을 남기고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시인의 생애는 비록 짧았지만 음울하고 가혹한 시대 상황 속에서 반드시 광복의 날은 오리라 믿고 써 내려간 주옥같은 시어들은 오늘날까지 해맑은 영혼의 징표로 남아 우리의 영혼을 정화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시대의 아픔을 온 몸으로 안고 밤하늘에 별빛 같은 삶을 산 시인의 삶을 다시 주목하고 기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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