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만해 선생과 불교계 독립운동가 명예 선양 방안

김태열 한국보훈포럼회장·영남이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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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계 독립운동가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건국훈장 1등급 대한민국장을 받은 만해 한용운 선생이 꼽힌다. 한 선생은 1879년 8월29일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에서 아버지 한응준과 어머니 온양 방씨 사이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 자는 정옥, 속명은 유천, 계명은 봉완, 법호는 만해(萬海)다.

 

그가 태어날 무렵 집안은 경제적 재력과 유교적 교양을 갖춘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유년시절 몸은 작았으나 힘이 세고 모험심이 강했으며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당찬 아이였다. 6세경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는데 9세 때 통감을 해득했다고 한다.

 

1892년 부친의 뜻에 따라 향리에서 전정숙과 혼인했고 이후 동리 서당의 숙사로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의인과 걸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과 같이 되고자 결심했다. 만해 선생이 승려가 되려 한 것은 종교적 신앙심 보다 불교계를 통해 무엇인가 해보고자 한 것으로 판단된다. 보은 속리사를 거쳐 설악산 백담사 등지를 전전하며 동냥중 생활을 했고 1904년경 완전히 속세와 인연을 끊고 승려가 됐다.

 

만해 선생의 주요 독립운동 활동을 살펴보면 첫째, 불교계 친일 승려 이회광을 척결하고 불교의 혁신운동을 일으켜 불교 대중화뿐만 아니라 대중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둘째,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태화관에서 민족대표의 행동 강령을 제시했다. 셋째, 1922년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된 물산장려운동을 지원하고 물산장려를 통한 민족경제의 육성과 민족교육을 위한 사립대 건립 운동에 앞장섰다.

 

넷째, 민족 저항 시인의 대표적 인물로 활동했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서로군정서 참모장, 지금의 대통령격에 해당하는 국민대표회의 의장을 지낸 만주벌 호랑이 일송 김동삼 선생 장례를 일제의 감시로 그 누구도 시신을 수습하지 않았으나 선생께서 직접 나서 심우장에서 수습하는 과정에서 통곡을 하며 나라의 미래를 걱정했다.

 

만해 선생은 일제강점기 여섯 번의 피소 및 투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변절하거나 전향하지 않았던 불교계 대표적 항일 독립투사로 후세들은 그의 애국정신을 본받아야 한다.

 

불교계 독립운동가 명예 선양을 위한 방안으로 현재 국가보훈부에서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서훈등급 재조정 사업에 만해 선생 이외 백용성, 김성숙, 최범술, 백초월, 신상완 선생에 대한 서훈 재조정이 필요하다.

 

특히 삼일절, 광복절, 순국선열의 날을 기념해 무명의 불교계 독립유공자 학술적 재조명 및 발굴이 절실히 필요한데 이를 위한 세부 추진 방향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보훈 학자들이 중심으로 독립운동 공적은 있으나 아직까지 서훈을 받지 못한 수많은 무명 독립운동가의 공적, 사진, 수형생활 기록, 만주, 상하이 등 외국에서의 활동 등 발굴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또 불교계, 학계 공동으로 보훈학술세미나 개최 및 기념관을 설립해 국민들에게 보훈문화를 확산시켜 보훈의 기본 이념인 은혜에 보답하는 실천적 자세로 그 책무를 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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