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서 백남준아트센터 학예연구사
1948년 에릭 아서 블레어, 필명 조지 오웰은 원자폭탄 개발과 비인간화를 조장하는 기술에 두려움을 안고 디스토피아 소설 ‘1984’(1949년)를 썼다. 미래의 어느 한 시점을 1984년으로 상정한 소설은 영국사회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 윈스턴 스미스라는 인물의 삶을 통해 사회를 관통한다. 스미스는 전체주의로 대변되는 빅브러더가 텔레스크린, 마이크로폰 등의 기술을 이용해 인민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국가에 저항하지만 종국에는 빅브러더에게 굴복하고 소설은 다음과 같은 비극적인 문장으로 끝난다. “그는 빅브러더를 사랑했다.”
마침내 오웰이 묘사한 미래 1984년이 됐을 때 소설은 다시 한 번 크게 주목받는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매체가 앞다퉈 소설 ‘1984’에서 그려낸 바를 당면한 현실과 대조하며 냉전 속 국제 갈등, 미디어를 사용한 통제가 오웰의 예언대로 실현되고 있다고 봤다.
백남준은 이 소설의 비관적 전망에 대해 ‘조지 오웰은 반밖에 맞지 않았다’고 봤다. 텔레비전을 쌍방향 소통의 도구로 창작해온 비디오 아티스트답게 말보다는 텔레비전 생중계 쇼로 응답했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이름으로 기획한 백남준의 위성 예술은 배우, 팝 가수, 아티스트가 연이어 등장하는 생방송 형식으로, 약 한 시간 동안 각 가정에 닿았다. 미국, 유럽, 아시아 3대륙 8개 도시에 생중계되면서 전 세계 2천500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시청했다고 기록된다. 오웰의 예언대로 기술이 세계 갈등과 긴장을 조성하고 감시 사회를 조장할 수 있지만 백남준은 전 세계 사람과 문화를 연결하는 기술의 새로운 가능성에 방점을 찍었다.
군사적 목적에서 비롯된 위성의 쓰임을 최대한 많은 사람이 함께 참여하는 비디오 축제를 위한 도구로 전환한 예술가의 실행은 지금도 여전히 놀라운 사건이다. 정보의 불균형,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이 제2차 세계대전, 베트남전과 같은 비극적 사건을 야기했다는 백남준의 지론은 전쟁 없는 사회에 대한 바람과 맞물려 텔레비전의 가능성에 닿는다. 텔레비전을 통해 각 가정에 방송된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세계 평화와 지구 보존이야말로 공익 제1호이며, 이것이 바로 공영 TV의 제1관심사가 돼야 할 것”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방송을 통해 실행한 것이다.
2024년 빅브러더 미디어 통제사회의 공포는 엄존하고 세계는 지금도 전쟁 중이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 40주년을 기념해 기획한 특별전 ‘일어나 2024년이야!’는 현재를 연결의 기술이 정점에 이른 인공위성 시대로 진단하고 과거 백남준의 위성 예술이 궁극적으로 지향한 세계 평화의 가치에 다시 주목한다. 밤하늘의 별처럼 크고 작은 인공위성이 지구를 가득 덮은 지금, 우리는 폐허에서도 전쟁의 참상을 실시간으로 알리는 위성망의 효용에 환호하기 전에 연결의 기술을 소통과 평화의 동력으로 사용하고 있는지 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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