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론] 떠도는 ‘제물포 혼’

박희제 인천언론인클럽 명예회장

image

엊그제 주말, 모처럼 재즈 뮤지컬을 관람했다. 인천 송도국제도시 내 예술공간 ‘트라이보울’ 무대에 올려진 ‘제물포 블루스’는 온통 제물포로 도배질 된 듯했다. 공연 안내 팸플릿에 ‘1926년 제물포에서 울려 퍼진 재즈의 선율로 사랑과 자유를 노래한다’고 적혀 있었다.

 

300석 관람석을 가득 메운 공연장 입구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마치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를 보는 듯 옛 TV 브라운관 4대와 색소폰, 기타, 드럼 같은 악기류, 1920년대 인력거를 조합한 ‘인터랙티브’ 설치작품이 전시돼 있었다. TV에선 3D 애니메이션 영상과 함께 뮤지컬 주제곡을 들려주며 관객들에게 1920년대 제물포로 시간여행을 떠나게 하는 장치였다.

 

공연장 또한 온통 제물포로 가득했다. 어릴 적 미국으로 입양된 한국인 재즈 기타리스트 주인공은 미국 뉴욕에서 만난 흑인 재즈 색소포니스트와 함께 뿌리를 찾아 고향 제물포로 돌아온다. 이들은 제물포구락부에서 재즈공연을 하며 독립운동에 나선다. 낮엔 이국적 문화가 공존하는 국제도시이자 밤엔 독립운동의 비밀기지로 변하는 제물포항(인천항) 일대에서 음악과 사랑, 자유를 향한 이야기다. 제물포의 중화요리점(공화춘) 주방장, 대불호텔의 러시아인 바리스타, 용동권번에서 일하는 3명의 기생, 제물포구락부 주인이자 마술사,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혼혈 여성 재즈가수들이 은밀히 독립운동을 한다. 일본 헌병 나카무라가 이들을 추적한다.

 

등장인물들이 코믹스러운 연기와 대사를 선보이자 관람객들이 박장대소했다. 무대 뒤쪽 6명의 재즈 뮤지션들은 ‘제물포 아리랑’ 등을 즉석 연주하며 흥을 돋웠다. 일본 헌병을 따돌리고 독립자금을 성공적으로 전달한 마지막 장면에 이어 색소폰 드럼 기타 베이스 연주가 각각 이뤄지자 공연장은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멋진 피날레였다. 제물포에 흠뻑 젖어 들게 만든 수작이었다. 작품 제작을 총괄한 예술감독은 인천에서 600년간 살아온 집안의 재즈 피아노 연주자이자 작곡가다. ‘뉴욕 아리랑’, 로드 뮤지컬 ‘예그리나(사랑하는 우리 사이라는 뜻을 지닌 순우리말)’, ‘제물포 야상곡’ 등의 작품을 선보이며 10년 넘게 제물포와 씨름하고 있다.

 

MZ세대인 예술감독에게 제물포를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를 물어봤다. “미국 보스턴음악대학에 유학할 때 시내를 둘러보면서 독립선언 광장, 독립전쟁 기념탑 등 미국 최초 역사 흔적이 서린 16곳 유적지에 엄청난 감명을 받았다. 고향으로 돌아와 제물포구락부, 월미도 조탕 등 근대역사를 간직한 ‘코리안 퍼스트’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고 나서 제물포 뮤지컬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의 제물포 사랑은 꾸준히 진화하고 있다.

 

인천시의 역점 사업인 ‘제물포 르네상스’에선 역사와 문화의 흔적을 느끼기 어렵다. 인천항 8부두 내 시민 개방구역의 옛 창고를 개축한 상상플랫폼은 정체불명의 관광시설로 둔갑되고 있다. 최근 시의원들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았다. 1, 8부두는 항만재개발 형식으로 진행돼 역사 흔적을 찾는 노력은 온데간데없다. 국내 최대 근대건축자산들이 동시대 정신과 호흡을 함께 못한 채 썩고 있어 안타깝다.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