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에 바탕을 두고 진리를 탐구하는 것을 ‘실사구시’라고 한다. 공리공론을 떠나 정확한 고증을 바탕으로 하는 과학적, 객관적 학문 태도는 우리 시대에 더욱 필요하다. 남양주 두물머리에 터를 잡은 실학박물관(관장 김필국)은 실사구시의 학문 태도를 재미있게 체험하고 배울 수 있는 배움터다.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장약용 선생의 고택과 묘소를 비롯한 유적과 남한강,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 자리 잡은 까닭에 평일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박물관 2층 상설전시실 입구에 실학을 상징하는 수레가 전시돼 있다. 박제가는 “하늘에서 나와 땅 위를 운행하는 도구”라며 수레를 적극 이용할 것을 주장했던 선진 학자였다. 박제가는 1800년 정약용과 종두법을 연구해 최초로 예방접종에 성공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추사 김정희는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가질까. 실학박물관은 ‘추사, 다시’라는 기획전을 과천 추사박물관과 제주 추사관과 협력해 10월26일까지 1층 전시실에서 연다.
■ 추사 글씨체를 캘리그래피로 만나는 ‘추사, 다시’
“실학박물관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체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전시회인데 관심을 가지고 많은 분들이 관람하면 좋겠습니다.” 김필국 관장은 이번 전시가 던지는 메시지가 상당할 것이라고 자신한다. ‘추사, 다시’라는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추사체를 재해석하고 이를 우리 시대의 서예인 ‘캘리그래피’로 재탄생시킨 작품을 선보이는 자리이니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는 의미다. 참고로 추사 김정희는 박제가에게 배웠고 정약용과도 친밀하게 지냈다. 전시는 1부 ‘추사’와 2부 ‘다시’로 구성되는데 1부에서는 ‘소봉래 난’, ‘유희삼매’ 등 추사의 주요 작품을 만나는 마당이다. “국보로 지정된 ‘세한도’는 길이가 14.7m에 달하는 작품인데 두루마리를 펼쳐 전체를 감상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입니다.” 구준모 학예사의 당부를 잊지 말아야겠다.
2부는 현재 우리나라 시각문화를 이끈다는 평가를 받는 디자이너 강병인, 김현진, 함지은, 양장점, DDBBMM 등의 작가들이 추사의 사상과 조형을 타이포그래피로 현대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재해석한 작품을 선보인다. 전시회를 총괄 기획한 석재원 홍익대 교수는 추사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추사는 해박한 타이포그래피 이론가이자 파격적 타이포그래피 세계를 구축한 전위예술가입니다.” 김필국 관장은 이번 전시의 의미를 이렇게 소개한다. “김정희 추사체는 일생에 걸쳐 자기 개성과 특성에 맞게 창조해 나간 과정의 결실입니다. 추사 선생의 예술혼이 현대예술가들에 의해 재창조돼 관람객들에게 새로운 경험과 감동을 선사할 것입니다.”
한편 과천 추사박물관은 5월10일 연계 전시회 ‘추사를 품다’를 열고 제주 추사관도 7월8일부터 ‘추사 김정희와 소치 허련’을 진행한다.
■ 조선의 하늘과 땅을 펼치다
2층 3전시실에서 열리는 ‘조선의 하늘과 땅’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다. 조선시대의 과학문화재를 소재로 한 실감 콘텐츠 체험 전시관답게 전시 방식이 신선하다. 360도로 펼쳐진 대형 발광다이오드(LED) 스크린으로 우리 전통 과학문화 발전의 발자취를 입체적으로 생생하게 보여준다. 우리의 과학문화재를 제대로 알리려는 박물관의 정성이 듬뿍 느껴지는 ‘1787: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관람객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11분짜리 영상을 감상하면 문예부흥기를 연 정조 시대의 과학기술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이름은 들었지만 내용은 잘 몰랐던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비롯해 이름도 생소한 ‘혼개통헌의’, ‘혼천시계’ 같은 과학문화재에 담긴 흥미로운 사연과 원리를 실감 나게 체험할 수 있어 관람객들의 반응이 좋다.
조선의 밤하늘로 여행을 떠나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정약용 같은 시대를 앞서간 실학자들을 만나 2025년 대한민국의 미래를 어떻게 설계해야 할지 자문하고 싶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 ‘내 손안의 곤여만국전도’는 디지털 퍼즐게임을 즐기며 조선시대의 세계지도와 세계 인식을 배워보는 체험활동이다. ‘AR-혼천시계’는 국보 혼천시계가 작동하는 원리를 증강현실로 보여준다. 쥐와 소, 호랑이를 비롯한 12가지의 동물이 주인공인 십이간지 캐릭터와 혼천의 주변에 펼쳐진 우주가 아름답게 펼쳐진다. 특별전시 ‘움직이는 천문과학전-똑딱똑딱! 해, 달, 별’은 제목처럼 전시 내용이 흥미롭다. ‘앙부일구’와 ‘혼개통헌의’의 원리와 기능을 이해하는 관람객은 얼마나 될까. 물론 미리 어렵지 않을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전시실을 둘러보면 자연스럽게 의문이 풀리기 때문이다. “실학박물관을 중심으로 남양주 관내 3개 기관에 이동식 전시 부스를 설치·운영하여 도민들의 호응을 얻었던 것입니다.”
■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온 박물관
실학박물관은 지난해 4월부터 10월까지 6개월 동안 개관 15주년 기념 특별기획전 ‘그림으로 다시 쓰는 자산어보’을 열었다. 시청각 체험을 통해 ‘실사구시’ 연구방법론으로 자산어보가 집필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경험하도록 기획한 참여형 전시였다. 실학박물관이 장애인들이 참여하는 전시를 꾸준히 기획한 점이 돋보인다. “발달장애 예술가 40여명이 그린 자산어보에 실린 해양생물 그림을 정약전의 글과 함께 선보인 것은 우리에게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2020년부터 시작된 코로나19로 박물관 방문하기 어려운 도민들을 온라인 가상현실(VR) 전시를 꾸준히 기획한 노력도 눈여겨볼 만하다. 온라인 가상현실을 통해 박물관을 직접 관람하는 듯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도록 구성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처럼 실학박물관은 관람객과의 다양한 만남, 새로운 만남을 모색하고 있다. ‘농사와 먹거리’를 주제로 살아있는 체험을 통해 실학정신을 배우는 가족 참여형 주말 프로그램도 이런 노력의 일환이다. 주말에 가족을 밭으로 초대하는 실학자는 어떤 분일까. 경기도를 대표하는 실학자 ‘서유구(고구마)’와 ‘정약용(상추)’, ‘이익(콩)’ 세 분을 밭에서 만나다니 그 발상이 재미있다.
발달장애인과 함께하는 문화나눔 프로그램 ‘오늘은 내가 실학자’는 정약용의 별명을 주제로 박물관을 쉽고 재미있게 체험할 수 있다. “직접 보고, 만들고, 이야기 나누며 각자가 주인공이 돼 박물관을 즐기는 즐거운 경험을 관람객들에게 제공할 것입니다.” 상설전시와 정약용 유적지를 연계한 현장 체험 교육인 ‘생생! 실학여행’도 인기가 많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정약용의 ‘목민심서’ 등 실학 관련 유물을 직접 살펴보고 정약용의 생가와 묘소를 둘러보며 활동하다 보면 실학은 어느덧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와 있음을 깨닫게 된다. ‘2025년 주말 상설 체험-실~하게 놀자!’도 상설 전시와 연계된 다양한 체험이 중심인 프로그램이다.
■ 실학의 숲에서 놀자
2025년 어린이날을 맞아 준비한 ‘실학 숲티어링’은 숲속에서 지도와 나침반 등으로 길을 찾는 놀이다. 박물관 옆 다산생태공원에서 진행되는 이 행사는 자연과 생태를 체험하고 즐길 수 있는 특별한 기회다. “실학박물관은 아름다운 다산생태공원을 활용해 숲체험과 숲티어링, 각종 놀이와 실학퀴즈 등 다양한 즐길거리를 준비했으며 이를 통해 ‘실학’과 ‘생태’라는 두 가지 소중한 주제를 아이들에게 선사할 예정입니다.” 실학박물관 로비에서 어린이날 특별 프로그램도 열린다고 한다. 지난해 조선시대 해양생물 백과사전인 자산어보를 주제로 아이들이 중심이 되는 체험 위주의 특별전과 ‘실학은 원래 박물관에 없었다’를 주제로 변화하는 시대와 호흡하고 발맞추는 사업을 전개했다. “지난해부터 실학을 낡고 고리타분한 학문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MZ세대를 손짓하는 다한 시도를 펼치고 있습니다.” 관람객들에게 더욱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한 실학박물관의 도전이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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