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마다 예술… ‘청춘의 도시’ 명성 되살린다
기차는 하루에도 몇 번씩 계곡으로 산으로 향하는 청춘들을 실어 날랐다. 주말 저녁이면 곳곳에서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나이트클럽을 방불케했다. 그러나 지난 2004년 기차가 끊기면서 오는 이도, 가는 이도 없는 폐허로 변했다. 잡초가 가득한 철길, 텅 빈채 녹슬어가는 역사, 양주의 장흥(長興)역이 그랬다. 1년이 걸렸다. 장흥역이 변하기 시작했다. 쓰레기로 가득찼던 폐가는 100여장의 LP판을 갖춘 카페와 부서진 가구를 리폼 받을 수 있는 공방, 무료로 사진을 찍어주는 사진관으로 탈바꿈했다. 마을 주민들에게조차 버려졌던 장흥역이 예술의 옷을 입고, 그때 그 시절 추억과 낭만을 나눌 수 있는 사랑방이 됐다. 예술과 삶이 함께 만나는 곳, 그곳에 장흥역이 있다.
■ 삶 안으로 걸어 들어간 예술
지난달 20일 장흥역 앞 ‘역전 다방’에서 만난 오명은 일영 1리 이장은 “이런 게 예술이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이렇게까지도 다가올 수 있는 거구나’했죠. 예술이라는 게…. 내 일상으로 예술이 들어올 수 있다는 게 전혀 뜻밖이었습니다”라는 말로 속마음을 나타냈다.
70~80년대 MT문화를 꽃 피웠던 장흥역 일대는 2004년 교외선 철도가 폐쇄되면서 8년 사이 슬럼가처럼 방치됐다. 특히 그 곳에 조각공원이나 아트밸리, 장흥아틀리에 등 문화예술특구를 구축해온 양주시의 입장에서 장흥역 주변은 눈엣가시였다. 지난해 10월 폐허가 된 장흥역 일대를 재생시키고자 예술가들이 들어오기 전까지의 상황이다.
이 때부터 예술가들이 주민들과 소통하는 과정을 통해 지역적 가치를 찾아내고 일구는 커뮤니티 아트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사업비는 경기문화재단이 댔고, 예술가 그룹은 수원미술전시관 수석큐레이터이자 커뮤니티 아트 기획자인 조두호씨가 이끄는 ‘오래된 미래팀’이 결합했다. 프로젝트 명은 ‘장흥 오라이’. 장흥이 모두 잘 될 것이라는 의미의 ‘Alright’와 장흥으로 오세요(오라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조두호 장흥오라이 기획팀장은 “장흥오라이 프로젝트의 관건은 주민들의 기대와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히 읽어내고, 그 가치를 재생시키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장흥역 살리자’ 예술가·주민 의기투합 폐가에 쌓인 쓰레기 치우기부터 시작
역앞 매점은 공방·다방은 찻집으로 단장 그때 그 시절 추억과 낭만 ‘새록새록’
■ 추억은 예술을 타고
거창한 사업을, 대단한 예술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지난날 장흥역을 거점으로 삼고 살아갔던 장흥면 주민들에게 더 이상 과거가 아닌 오늘의 장흥역을 만들겠다는 게 목표였다.
시작은 8년간 시간이 멈춰 있던 역 앞 매점, 찻집, 전파상에 쌓인 쓰레기를 치우는 일부터였다. 트럭 세대 분량의 어마어마한 쓰레기가 쏟아졌다. 이후 프로젝트에 참여한 예술가들과 일영리 마을 주민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그렇게 한 장면씩 되살린 기억은 종이에 재현되고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되면서 전체적인 프로젝트의 윤곽을 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매점은 DIY(Do It Yourself) 수업과 목공 가구의 수리 및 리폼이 이루어질 ‘두꺼비꽁(짜)방’이 됐고 전파상은 장흥면 유일의 사진관인 ‘장수사진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역전 다방은 옛 이름 그대로 ‘다운휴게소’라는 명패를 걸고 찻집이 됐다. 온전히 새것은 아니었다. 지난 40년의 흔적을 자연스럽게 남겼다.
이 모든 일의 주연은 주민들이었다. ‘목수 출신’인 오명은 이장은 오랜만에 연장을 들었고, 공방 인테리어와 지붕공사를 도맡았다. 동네 어르신들은 카메라 앞에서 어린아이 같은 미소로 사진을 찍었다.
■ 이제부터가 시작
깨끗하게 정리된 것은 모두들 좋아하지만, 아직까지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마을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 잘 모른다는 생각에 지난 6월 프로젝트의 제막식과 결과보고전시회를 열었다. 장흥 오라이 프로젝트가 일단락 된 것이다. 예술가는 떠났고 주민들과 3개의 커뮤니티 공간만 남겨졌다.
그렇다고 주민들의 마음도 떠난 건 아니었다. 곧바로 오명은 이장을 중심으로 ‘장흥 오라이 추진단’이 구성됐고, 3개 공간에 대한 구체적인 운영 계획도 세워졌다. 마을 축제도 고민중이다.
장흥 오라이 팀도 다시 거들겠다고 나섰다. 올 하반기에는 마을 주민들 스스로 공간을 운영해 나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할 예정이다.
조두호 기획팀장은 “취지 자체가 소통의 예술에 있는 만큼 앞으로 이 공간을 통해 이곳 주민들이 스스로 가치를 만들고 소통해 나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라고 말했다.
“설마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나. 다 쓰러져가는 역이 이렇게 변할지 누가 알았겠어….”
마을 제일의 보금자리가 생겼다고 흐뭇하게 미소 짓는 백발 노인의 눈동자에 옛 장흥역의 영광이 스쳐지났다. ‘장흥(長興)’이라는 지명처럼 이곳이 ‘길게 흥할 곳’일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롭다.
윤철원기자 ycw@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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