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길인생, 길을 찾다] 입체조형 예술가 최정현

버려지는 것들에 풍자·해학 더해 예술작품 ‘부활’

전시장에 들어서니 ‘열받은 펭귄 가족’이라는 작품이 먼저 관람객을 맞는다. 펭귄이 열을 받았다? ‘재밌네’ 하며 들여다 보니 재료가 모두 소화기다. 눈을 살짝 돌려보니 이건 또 뭔가? 변기를 뚫는 도구, 일명 ‘뻥뚫어’를 지붕에 얹은 ‘국회의사당’이 보인다. 이게 다가 아니다. 숟가락과 포크를 구부려 합친 ‘플라밍고’, 팥알로 만든 ‘개미떼’, 키보드로 만든 ‘체류탄’ 등 시선을 끄는 작품마다 재료란 것이 우리가 흔히 쓰다 버린 물건들이다. 일반 사람들에겐 하찮게만 보이는 고물로 이런 근사한 작품들을 만든 사람은 누굴까? 주인공은 바로 입체조형 예술가 최정현(52)이다. 지난 25년 동안 만화 ‘반쪽이’시리즈로 인기를 한몸에 받았던 그가 작가 특유의 상상력과 재치, 풍자까지 곁들여 고물을 입체작품으로 탄생시킨 것이다. 작품 소재만큼이나 소탈한 첫인상을 가진 최정현을 지난달 18일 전시 ‘뚝딱뚝딱 고물 자연사박물관’이 열리고 있는 화성 동탄복합문화센터에서 만났다.

■ 고물에 새 생명을 불어넣다

무섭기도 하고 귀여워 보이기도 하는 ‘열받은 펭귄 가족’은 그가 내 집처럼 드나드는 고물상에서 소화기를 발견하는 순간 “그래 이거다” 라는 감탄사로부터 비롯됐다. 그 순간 지구 온난화로 이상 기후현상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세상에 ‘뿔난 자연’의 메시지를 전달하기로 한 것.

빨간 소화기는 화가 난 펭귄의 몸통으로, 뾰족한 쇳덩이로 이뤄진 입은 마치 자연을 할퀴는 사람들처럼 표현했다. 여기에 환경파괴를 멈추라는 의미를 전하기 위해 자동차 브레이크 패드로 만든 팔을 몸통에 붙여 완성했다.

‘반쪽이의 육아일기’로 유명세 탄 만화가 펜 놓고 용접기 들자 25년 아이디어 봇물

생활속 고물에 사회적 메시지 담아 ‘새생명’ 도로표지판 활용한 재활용전시관 여는 게 꿈

언뜻 보면 대충 만들었을 것 같은 그의 작품에는 보는 이들에게 즐거움을 전하는 외면적인 표현과 더불어 내면에는 철학적인 사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바로 최 작가의 3단계 법칙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그는 재료, 주인공, 제목으로 관람객을 이해시킨다. 야심작 ‘로드킬’을 보면 작가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다. 재료는 타이어, 주인공은 눌린 고양이로 관람객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리고 ‘로드킬’이라는 제목을 통해 보는 이들의 상상과 작품의미가 오버랩 될 수 있도록 돕는다.

“나무, 스테인리스스틸, 석고 등으로 만든 작품은 작가 의도를 알아차리기가 어렵죠. 하지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마우스, 옷걸이로 만든 작품은 뭘 의미하는 지 금방 눈치를 챈답니다. 여기에 제목까지 붙여지면 관람객들은 제3단계 공격에 까르르하고 웃음을 터트릴 수 밖에 없어요.”

이런 그를 일각에서는 ‘정크 아티스트’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즐거운 만화조각가(만조)’라고 칭했다. 정크 아트는 여러 사물을 붙이고 붙여 덩치를 키우지만, 그가 만든 작품은 원초적인 재료와 철학이 연결된 입체식 만화이기 때문이다.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그는 단골 고물상 10여군데를 주기적으로 방문한다. 고물상이 많다는 화성 봉담에 작업실을 차린 것도 그 이유에서다. 특히 작업실 주변 고물상에선 쌓여진 고물들 각각에 깃들여진 사연을 쉽게 들을 수 있는 것. 고물의 사연과 최 작가의 생각이 일치했을 때, 고물은 비로소 제2의 인생을 찾게 된다.

“여기저기 상처 난 재료들을 보면 우울해요. 근데 작품으로 완성하면 방금 생산한 새 물건들보다 오히려 좋죠. 재료에 난 상처가 인간에 의해 생겨났다기보다 고생하며 살아온 삶으로 느껴지거든요. 난 그들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는 것 뿐이에요.”

■ 25년간의 아이디어, 입체로 터지다

1990년대 ‘반쪽이의 육아일기’로 유명세를 탔던 만화가가 왜 고물상을 돌며 재료를 수집하고, 용접기를 들었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부인 변재란씨와 딸 최하예린씨가 오랜 시간 이들의 사생활이 일기를 통해 노출되면서 “아빠, 이제 그만!”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반쪽이 시리즈의 마침표 시기를 놓고 고심하던 중 딸과 함께 떠난 런던 여행에서 그는 자신이 평생 걸어갈 새로운 길을 찾게 됐다. 런던자연사박물관에서 만난 작품들이 그의 가슴을 설레게 한 것.

“박물관에 들어선 순간 어마어마한 양의 작품들을 보면서 이 정도 양이면 평생 달라붙을 만 하다고 느꼈죠. 대신 나는 남들과 다르게 작품의 소재를 고물로 바꾸고, 거기에 인간들의 사연을 풍자적으로 넣겠다고 결정했어요.”

펜촉을 내려놓고 용접기를 잡자 그가 25년간 만화를 그려오면서 스스로 터득한 아이디어 발상법이 온몸에 자리 잡고 있다가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여기에 그의 손재주까지 더해지면서 한 달 만에 400점의 작품을 탄생시켰다.

최 작가는 국내 순회 전시 도중 후배 만화가들이 전시장을 방문하면 “좋은 아이디어를 설계해놓고 왜 다 갖다버리느냐. 입체로 남기면 영원할 텐데”라는 말을 자주 했다. 보는 이가 판단했을 때 평면작품인 만화보다 입체작품의 효과가 크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해서였다.

최 작가는 “그림은 아이디어 설계일 뿐입니다. 만화는 한 번 보고 나면 그만인 일회성 작품에 불과해요. 반쪽이를 그리던 1988년 처음으로 수류탄을 이용해 ‘짭새’를 완성했는데 작품이 내뿜는 카리스마가 장난이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 100% 재활용 전시관 꿈꾼다

전시장에는 잔잔한 음악이 흐른다. 음악이 나오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세제통이 눈에 띈다. 깨끗히 씻어주는 일을 하고 버려진 세제통을 말끔하게 씻어, 세상의 밝은 소리를 전하도록 최정현이 라디오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세제통 라디오라고 무시하면 안된다. 주파수 조절은 물론 볼륨까지 줄였다 키웠다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쉽게 사용하고 버리죠. 하지만 고물로 만든 작품들을 자세히 보면 내가 만든 게 하나도 없어요. 연출만 했을 뿐이에요. 나를 위해 재료를 만드는 전세계인들로부터 에너지가 나오죠.”

그는 최근들어 100% 재활용 전시관을 구상 중이다. 절에서 기왓장에 소원을 써 불사를 하듯, 생명을 다한 도로표지판에 방문객들이 글을 쓴 뒤 그것들을 모아 돔 형식의 건물을 세우려는 것.

또 도로표지판이 빛 반사가 뛰어나다는 특징을 살려 건물 주위에 주차장을 만들어 차량에서 나오는 불빛을 이용해 건물 외부를 밝히고, 주변엔 고물 작품을 직접 만들 수 있는 체험활동장까지 설치하는 구체적 방안까지 생각해놨다.

최 작가는 “화성에 100% 재활용 전시관을 세우기 위해 국내를 돌며 전시를 열고 있다”며 “사람들이 내게 준 고물들로 작품을 만들고, 그들과 환경까지 함께하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장혜준기자 wshj222@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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