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끝에 스며든 장인의 혼… 전통의 숨결 잇는다
바다만큼 푸르고 햇살처럼 빛나는 처마밑의 하늘, 단청.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마저 오색으로 물들이는 단청 아래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 본다.
어쩌면 하늘까지 닿고 싶은 사람의 마음이 단청을 만들어 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을 보듯 고개를 들고 단청을 바라보았다. 처마 끝자락을 타고 흘러내리는 오색 빛깔을 따라가다보면 내가 가보지 못한 새로운 곳에 도달해 있을 것 같은 기분이 오래도록 나를 사로잡았다.
도심속 사찰로 유명한 인천 석암산의 수도사에서 혜명 정성길 단청장(55·인천시 무형문화재 제14호)을 만났다. 정 단청장은 수도사 대웅전의 단청을 새단장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다행히도 그 날이 공사 마지막 날이어서 장인이 단청을 하나하나 완성해 가는 과정도 지켜보고,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한 대웅전의 아름다움도 만끽할 수 있었다.
수도사는 단청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모두 정 단청장의 작품이다. 대웅전은 물론 삼천불전, 일주문, 극락보전, 칠성각까지 손이 안간 게 없다. 특히 삼천불전 단청은 장인이 오롯하게 자신의 기술과 열정으로 완성한 첫 작품이기도 하다.
“수도사 삼천불전은 나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과 같은 곳이야. 항상 처음과 같은 마음으로 단청을 대하게 만들고 마지막에는 늘 이곳으로 돌아오게 만들지.”
■ 단청, 소년의 꿈이 되다
장인은 인천 영종도 운북동 동강리의 불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자연스럽게 영종도 백운산 동북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던 용궁사는 그의 놀이터가 됐다.
작은 시골아이는 사찰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단청에 한눈에 반해버렸다. 고개가 아프도록 단청을 올려다봐도 지루한 걸 몰랐다. 열여덟살 때 동네에서 알고 지내던 형이 “멀리 경상도에서 단청 그리는 일을 하고 있다면서 같이 가지 않겠냐”고 하자 그길로 따라나선다. 우연하게 출발한 길에서 그의 단청 인생을 열어준 혜각스님(1905~1998·통도사·국가중요문화재 단청장 48호)과 연을 맺는다. 당시 혜각스님은 통도사가 낳은 금어(金魚)라고 불릴 정도로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단청분야의 일인자였다.
가족들은 그가 단청 기술을 배우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재단사나 재봉사가 되라고 권유하기도 했지만, 꿈을 버리지 못했다.
“그 때는 월급이라는 개념도 없었고, 먹여주고 재워주면서 기술을 가르쳐줬으니까 그게 당연하다고 여겼지. 비록 부유하게 살지는 못했지만 한번도 단청의 길로 들어선 것을 후회한 적은 없어. 오히려 이렇게 살 수 있어서 감사할 따름이지.”
■ 단청, 꽃을 피우다
혜각스님만큼이나 장인에게 큰 영향을 준 사람은 혜원 김준웅 선생(1941~2010·충남 무형문화재 제33호)이었다. 김 선생은 장인의 단청수학을 돕고 스승 역할까지 도맡았다. 장인은 김 선생과 함께 혜각스님 문하에서 10여년동안 기술을 배우고 익혀 1986년 수도사 삼천불전 단청을 시작으로 독립했다.
지금까지 그가 참여한 단청만 해도 무량사, 약사사, 도선사 등 200곳이 넘는다. 인천에서 볼 수 있는 단청은 대부분 그의 손을 거쳐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인은 금문초 기법에서 탁월한 기량을 인정받고 있다. 금문(錦紋)이란 무늬를 수놓은 비단처럼 현란하고 아름다운 문양으로, 신성과 위엄을 표현한다.
장인은 2004년 인천시 무형문화재 단청장으로 지정됐고, 2005년에는 문화재청 단청 상시 자문위원으로 위촉됐다.
단청은 본래 ‘장식’의 의미보다 ‘보전’의 의미가 강했다. 궁궐이나 사찰을 이루고 있는 나무가 습기를 먹어 뒤틀리거나 썩지 않게끔, 벌레가 파고들어 틈이 벌어지고 헐거워져 부서지지 않게끔 틈을 메우고 덧바르던 것이 단청의 시작이었다.
장인의 단청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혼’이다. 세월이 흐르고 단청은 화려한 색과 문양을 덧입었지만 단순히 멋지기만 한 그림으로는 생명력을 얻을 수 없다는 게 장인의 지론이다. “혼과 정성이 없으면 아무런 감흥도 없는 법이지. 작은 구석 하나도 놓치면 안돼. 보이지 않는 곳까지 꼼꼼하게 색을 입히고 그림을 넣은 이유가 무엇인지 잊는 순간 단청으로서는 끝인거야.”
단청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처마밑에 그림을 그려야 하니 목은 항상 뻐근하고 어깨에는 돌덩이를 얹어놓은 것 같은 통증을 견뎌야 한다. 멋모르고 단청을 배우겠다 도전했던 사람들 중에는 반나절만에 붓을 내려놓은 이도 있었다.
단청은 오방색(청·적·황·백·먹)이 기본이다. 물감이 없던 시절에는 납으로 적색을 내고, 돌을 갈아 먹색을 만들고 조개껍질로 흰색을 표현했다. 그냥은 나무에 색이 잘 먹지 않으니 쌀풀같은 것을 만들어 접착제로 사용하곤 했는데 기술이 발달하면서 화학약품으로 만든 안료와 접착제를 사용하게 됐다.
장인은 “사실 단청을 옛방식 그대로 재현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유지관리를 생각하면 화학약품을 쓸 수밖에 없다는 게 아쉽다”고 말한다.
단청작업은 출초 작업, 즉 문양을 그리는 것부터 한다.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송곳으로 선을 따라 촘촘하게 작은 구멍을 낸다. 작업이 끝나면 출초를 기둥이나 석까래에 대고 밀가루를 묻히는 타초작업, 밑그림 그리는 일을 한다. 밑그림에 색을 칠하면 단청이 완성된다.
단청은 일손이 많이 필요한 작업이다. 국내에서 단청작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1천여명이 넘지만 단청장 칭호를 받은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장인은 후계자 계승에 힘쓰고 있다.
■ 단청, 역사가 되다
장인의 혼이 담긴 단청을 가만히 쓰다듬어 보았다. 20~30년 전에는 화려한 색을 자랑했을 단청이 세월에 떠밀려 엷어져 가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누구보다 단청을 사랑하는 장인은 더했으리라.
장인은 각종 문화재급 건축물을 보수하면서 남은 부재를 모아 자신의 호를 딴 혜명박물관을 만들었다. 박물관 문을 연지도 벌써 햇수로 4년이 넘었다.
옛 단청자료들이 아무렇게나 취급되거나 버려지는 것이 안타까워 하나둘씩 모으기 시작해 전국 각지에서 수집한 단청유물만도 2천여점에 달한다. 개인 박물관이다보니 수장고도 부족하고 운영하는데 어려움이 많지만 후손들에게 옛 선조들의 솜씨의 예술의 혼을 전해줄 귀중한 문화유산이라는 생각으로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단청을 더 좋아하고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어. 내가 인천지역 단청장이 된 것도 앞으로 인천에 널려 있는 소중한 단청자산을 보전하고 알리는데 앞장서달라는 뜻 아니겠나 생각하고 있어.”
김미경기자 kmk@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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