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1. 남양주 ‘모란미술관’

로댕의 열정 결정체 ‘발자크’와 마주하다 남양주시 화도읍 문안산 모란봉 아래 자리를 잡은 모란미술관(관장 이연수)은 푸르름에 싸여있다. 파란 하늘빛을 닮은 미술관 대문은 페루 출신의 세계적 작가 알베르토 구즈만의 작품 ‘문’이다. 5월 19일부터 김아타 초대전 ‘자연하다(ONNATURE)’가 열리고 있는 미술관 안으로 들어서자 넓은 잔디밭이 펼쳐진다. 몇 걸음을 걷지 않았는데 새로운 세계에 들어선 느낌이다. 미술관 중앙에 초대전이 열리는 본관이 있고, 본관 왼편에 연노랑 색깔의 수장고와 ‘노래하는 탑’이 서 있다.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높이 27m의 이 콘크리트 탑은 고(故) 이영범 건축가의 작품인데, 2003년 미국건축가협회 뉴욕지부로부터 디자인상을 받았다. ‘노래하는 탑’엔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상 ‘발자크’가 전시돼 있다. 로댕은 1898년에 대문호 ‘발자크’를 완성하고 이렇게 고백한다. “사람들이 비웃는 이 작품,... 기를 쓰고 조롱하는 이 작품은, 나의 필생의 역작이며 미학적 동력이다. 이것을 창조한 날부터 나는 새로운 인간이 되었다” 곁에는 광화문 ‘충무공이순신장군상’을 조각한 고 김세중(1928~1986)의 조각상 ‘피에타’가 있다. 탑에 새겨 놓은 고 이경성 평론가의 ‘모란탑의 존재감-시심의 영토’라는 글을 통해 탑을 비스듬히 세운 작가의 뜻을 가늠해본다. ■ 조각의 숲에서 ‘자연하다’ 본관으로 이어진 산책로에도 ‘가족’이나 ‘평화’ 같은 정겨운 조각 작품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넓은 잔디밭 한가운데 놓인 최만린의 ‘태(胎)’는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율동적이다. 속이 드러난 고목처럼 카페 곁에 서 있는 작품은 전국광의 ‘積(적)-만남의 장’이다.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녹음에 둘러싸인 미술관의 풍경에 빠져든다. 김유나 학예팀장의 안내를 받으며 김아타 초대전 ‘자연하다’를 둘러본다. “작가는 예술이 인간의 전유물이 아님을 깨달았다고 하더군요. 전시회 주제가 ‘자연’이란 명사와 ‘하다’라는 동사를 결합한 ‘자연하다’입니다. 미국과 인도 등 세계 곳곳에 캔버스를 세워 놓고 수년을 기다렸다고 해요. 자연이 빚어낸 작품들이지요” 커다란 캔버스를 붉게 칠한 작품이 전시실 벽면을 가득 채웠다. 이어지는 공간에서 마주한 작품들은 온통 검은색이다. 가까이서 살펴보니 표면이 거칠다. 군 당국을 설득하여 허가를 받고 사격장에 캔버스를 설치하여 포탄에 맞아 갈가리 찢긴 조각을 캔버스 위에 펼쳐 붙이고 붉은색과 검은색을 입힌 것이라 한다. 작품 옆에 부착된 작가의 말이 묵직하다. “포가 그린 그림이다. ...폭력의 역사도 자연이다. ...갈등과 야만의 역사도 외면할 수 없는 인간의 역사이다. 군 당국의 허가를 받는데 3년, 작업을 하는데 3년을 집중했다. 3년을 침묵했다. 절망을 길게 사유했다. 검정했다. 빨강했다” 작가의 작업 방식만큼이나 해설도 파격적이다. 여러 해 동안 캔버스를 바닷물 속에 담가 두거나, 바람 부는 들판에 세워 두거나, 모래밭에 묻어두었다가 꺼내 어떻게 자연으로 돌아가는지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작가의 말대로 ‘자연이 그린 그림’이다. 강원도 인제 숲속에, 제주도 유채밭에 캔버스를 세웠던 작가는 모란미술관 정원에도 캔버스를 세웠다. 앞으로 2년 동안 나무 그늘 밑에서 비와 바람을 맞으며 스스로 그림을 그릴 것이다. 이연수 관장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김 작가는 모란미술관을 이렇게 소개한다. “삶과 죽음이 서로 어깨를 기대고 있는 곳, 있음과 없음이 같이 있는 환상적인 공간이다” ■ 삶과 죽음, 자연을 노래하는 조각 전문미술관 야외전시장은 볼거리가 더욱 풍성하다.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 나무 아래로 조각 작품들이 곳곳에 있는 정원은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다. 뒷짐을 진 노인이 염소 가족을 이끌고 장터로 향하는 모습을 조형한 백현옥의 ‘장날’은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아이들이 염소를 잡고 놀다가 쓰러뜨려 몇 차례 다시 세웠어요. 그래도 관장님은 울타리를 치지 말고 그대로 두라고 하세요” 한국 추상조각 1세대 작가 최만린의 ‘095-9’는 대지가 지닌 원초적 생명력을 추상성으로 구현한 작품이다. 한참 바라보면 가슴이 뭉클해지는 작품도 있다. 김영중의 ‘사랑’이 그렇다. 임영선의 ‘사람들-오늘’은 삶의 무게에 짓눌려 떠밀려가듯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고단한 모습을 보여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1990년 4월에 문을 연 모란미술관의 개관전 주제는 ‘21세기를 향한 조각의 새 표현 전’이다. 이후 줄곧 조각의 현실을 진단하며 방향성을 제시해왔다. 2020년 3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기획전의 주제는 ‘조각의 아름다움’이다. 조각으로 시작해 다시 조각이다. 1992년에 열었던 ‘국제조각심포지엄’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국제적인 명성을 가진 네덜란드의 마크 브루스, 프랑스에서 활동 중인 페루 출신의 알베르토 구즈만 등 국내외 작가 9명이 한 달 가깝게 머물면서 미술관 마당에 마련한 작업장에서 작품을 제작하는 모든 과정을 관람객들에게 공개하는 행사였다. 1995년에 ‘모란미술대상’을 제정하고 1997년부터 ‘모란조각대상’으로 장르를 특정해 격년제로 2007년까지 시행하여 역량 있는 조각가를 발굴 지원하였다. 개관 25주년을 맞은 2015년에는 건축과 설치, 조각을 아우르는 ‘모란 폴리 2015’ 국제공모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처럼 모란미술관은 한국 조각계에 획을 긋는 중요한 사업을 진행하며 질적 성장을 거듭해왔다. 이러한 일을 주도한 인물 역시 이연수 관장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30년 전 이처럼 외진 곳에 미술관을 세울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결혼하고 둘째 아이를 낳자마자 혼자 돌아다닌 곳이 화랑이었어요. 어느 날 한 작가의 그림 앞에서 발을 뗄 수가 없었지요. 그때 당시 공무원이었던 남편에게 나중에 돈 생기면 화랑 하나 차려달라고 부탁했어요” 이 관장의 남편 고 홍석웅 회장은 ‘민주화 운동가의 묘지’로 널리 알려진 한국 최초의 사설 공동묘지인 모란공원을 경영하며 부인 이연수 관장이 모란미술관을 설립하고 운영하도록 뒷받침한 인물이다. 이 관장은 지난 32년 동안 ‘돈 먹는 하마’인 사립미술관을 꿋꿋하게 지켜온 비결을 이렇게 말한다. “남편의 든든한 후원과 이 아름다운 공간에 대한 사랑이 지금까지 오게 한 힘인 것 같아요” ■ 어머니 품처럼 따스하고 편안한 미술관 이연수 관장은 국내 대표 조각가들과 오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돈이 없는 작가가 외국에 갈 일이 생기면 비행기 표를 끊어주고, 차가 없는 작가에게는 남편의 중고 자동차를 선물하기도 했다. 모란미술관은 조각계에서 어머니가 계시는 친정처럼 편안한 곳이 됐다. 고 김세중 조각가의 아내 김남조 시인, 화계사 국제선원장을 지낸 현각 스님 등 문화예술인은 물론 종교인들과도 폭넓게 교류하고 있는 이 관장은 15년간 모란미술관 고문을 맡아준 고 이경성(1919~2009) 평론가와의 특별한 인연에 감사한다. 스승의 역할을 해 주던 이경성 선생이 별세하자 선생을 미술관 옆 모란공원 묘지에 모셨다. 최태만·김종길·김성호 등 실력을 인정받는 평론가와 큐레이터들이 이곳을 거쳐 갔던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자랑이다. 이 관장은 늦은 나이에 대학원에 진학하여 미술교육을 전공하고 숙명여대에서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경기도박물관협회장과 한국사립미술관협회장으로도 활동한 ‘여걸’이다. 그러나 사람을 대하는 이 관장의 태도와 말씨는 무척 부드럽고 따뜻하다. 그는 작품을 살 때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먼저 알아본다고 한다. “고 이경성 선생님이 알려줬어요. 작품이 곧 사람이라고. 작품 속에 작가가 녹아있는 거죠. 그래서 사람을 봐야 합니다. 30년의 경험을 통해 알고 보니 작품은 곧 작가의 인성 그 자체더군요” 미술관을 거닐며 조각 작품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마음이 편안하고 홀가분해진다. 자연의 품에 안긴 모란미술관은 어머니의 가슴처럼 아늑하고 따스한 위로와 휴식의 공간이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2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0. 포천역사문화관

‘포천’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자신의 경험과 관심에 따라 명성산과 산정호수를, 광릉 국립수목원이나 한탄강을, 금수정을 비롯한 ‘영평 팔경’을, 이동막걸리나 이동갈비 또는 한과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겠다. 주상절리로 유명한 한탄강을 품은 ‘포천(抱川)’은 구석기시대부터 1950년 한국전쟁 전적지까지 역사문화유산이 매우 풍부한 도시다. 그러나 포천시를 즐겨 찾는 여행객은 물론 이곳에 터를 잡고 사는 지역민들도 포천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포천은 땅의 크기가 경기도 31개 시군 중에서 가평, 양평에 이어 세 번째에 속한다. 그러니 역사문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도 시 전체를 둘러보기가 쉽지 않다. 고구려는 포천을 ‘마홀’이라 불렀는데, 물이 많은 고을이란 뜻이다. 신라는 견고한 성을 쌓아 ‘견성’이라 부르다가 ‘청성’이라 했고, 고려는 개성의 배후 지역으로 관리하며 ‘포주’라고 불렀다. 지금의 지명인 포천으로 부른 것은 조선 태종때인 1413년이다. 포천의 ‘천’은 한탄강을 가리킨다. 한탄강 줄기를 중심으로 구석기-신석기-청동기의 문화가 모두 남아있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와 조선의 역사유적도 풍부하다. 포천시에는 총 84건의 문화유산이 있는데, 국가지정문화재가 10건, 경기도 지정문화재가 23건, 등록문화재가 2건, 포천시 향토유적이 49건이다. ■ 크진 않지만 알찬 박물관 “자연이 아름다운 옛 선비들의 고장” 포천을 제대로 만나려면 반드시 찾아야 할 곳이 있다. 바로 2015년 7월에 개관하여 2017년 7월에 경기도 공립박물관으로 등록한 ‘포천역사문화관’이다. 장보정 학예연구사의 표현처럼 포천역사문화관은 규모는 그리 크지는 않지만, 내용이 꽤 알찬 실속형 박물관이다. 상설전시실은 포천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입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전시실에서 150만 년 전 포천에서 살았던 구석기인들이 사용한 돌도끼와 신석기인들이 사용한 ‘어망추’와 옷을 지을 때 사용한 ‘가락바퀴’와 마주한다. 유물을 통해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는 것이다. 유리관에 돌조각들이 나란히 놓여 있다. “용암이 분출될 때 생성된 흑요석인데, 날카로운 날을 만들 수 있어 신석기인들에게 최고의 도구였지요. 포천 한탄강 일대에서 약 2만 점에 달하는 구석기 유물이 쏟아졌다고 해요” 포천이 아득한 옛날부터 살기 좋은 환경을 갖추었다는 관계자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인다. 내부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전시기법이 흥미롭다. 청동기인들은 고인돌 안에 무엇을 넣었을까 궁금했는데, 그 궁금증을 풀어준다. 무덤을 잘라 부장품이 보이도록 전시한 것이다. 온전한 모습을 갖춘 형이상학적인 ‘그릇받침’은 원삼국 시대의 유물이다. 물론 삼국이 치열하게 경쟁하던 시기의 유물도 있다. 기와 조각에 ‘마홀수해공구단’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고구려가 포천을 ‘마홀’이라 불렀음을 알려주는 귀중한 유물이에요. 백제가 경기 북부지역을 점령했던 5세기 중반 때 처음 쌓기 시작한 반월산성(사적 제403호)은 포천이 전략적 요충지였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철로 만든 도끼와 낫, 그리고 숫돌은 반월산성에서 출토된 것이죠” 반월산성은 포천에 있는 10개의 산성중에서 규모가 제일 크다. 구읍리 군내면사무소 부근에 있는 반월산성은 성의 모양이 반달처럼 생겼다. 백제 한성이 함락된 후 6세기 중반에는 고구려에서 활용한다. 포천에는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부하 왕건과 싸우다가 패해 도망치다가 통곡했다는 명성산(울음산)을 비롯해 흥미로운 전설이 전해지는 것은 바로 옆이 태봉의 수도였던 철원이기 때문이다. 빼어난 인물들을 여럿 배출한 고장답게 포천에는 서원이 4개나 있다. 옥병서원에는 사암(思庵) 박순 선생이 배향되어 있다.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그는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임진왜란 때 병조판서로 활약한 백사 이항복도 포천의 인물이다. 백사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화산서원은 1659년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용연서원은 한음 이덕형과 용주 조경을 모신 곳인데,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도 살아남은 47개 서원의 하나다. 임진왜란을 극복한 명신이자 청백리이며 우정의 대명사인 오성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은 포천의 자랑이다. ■ 살아 숨 쉬는 예술과 충절의 정신 “영중면 양문리에 위치한 금석문은 우리나라에 4개 밖에 없는 한글비입니다. 1686년 낭선군이 제작한 이 비석은 제작배경이 정확한 것으로 종친이 만든 유일한 금석문이지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비인 이윤탁의 한글영비(1536년) 이후에 제작된 이 비는 국어 발달의 이해에 도움을 주는 유물입니다” 한글비 탁본이 시선을 끈다. 장 학예사가 비석에 새겨진 글 뜻을 풀어준다. “선조의 서자 인흥군 이영이 묻힌 곳에 세워진 비석에 새겨진 글씨인데 현대어로 옮기면, ‘이 비가 매우 영험한 힘이 있으니 어떠한 생각으로라도 사람이 거만스럽게 낮추어 보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 한글 비석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의 하나라고 한다. 봉래 양사언의 멋진 초서를 비롯해 임금이 친히 쓴 어필도 있다. ‘인평대군치제문비’는 인조의 셋째아들이자 소현세자와 효종의 동생인 인평대군 이요(1622~1658)의 인품과 업적을 기리고 위로하고자 신북리에 세운 비다. 효종과 숙종, 영조와 정조 네 분 임금의 글씨를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점이 특별하다. 인평대군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던 두 형이 풀려나면서 대신 볼모로 가야 했지만, 돌아와서는 사은사로 4차례나 청나라를 왕래하는 외교관으로 활약했다. 박물관에서 비문의 내용을 살펴보고 현장에 찾아가서 비문을 마주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면 우리 문화재를 이해하는 안목이 더욱 깊어질 것이다. 토정 이지함(1517~1578)이나 벽암 이벽(1754~1785)처럼 특별한 인물도 만날 수 있다. 포천 화현면 출신인 이벽은 처남 정약전, 정약용 형제에게 천주교와 서양의 선진문물을 전해준 인물이다. ‘토정비결’로 더욱 유명한 이지함은 포천 현감으로 재직하며 한반도의 중앙인 포천의 지리적 이점을 살려 상업활동을 권장하여 부유한 고을로 만들 방안을 조정에 제시한 선각자이다. 포천에는 보수의 상징인 인물도 있다. 관복을 입은 한 사람이 정면을 응시한 초상화가 조금 낯설다. 면암 최익현 선생의 부릅뜬 눈이 이 시대를 꾸짖는 듯하다. 포천면 신북면에서 태어난 면암은 ‘바른 것을 지키고 옮지 못한 것을 물리친다’는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하다 대마도로 유배되어 단식투쟁을 하다 1906년에 돌아가셨다. 그의 아들 최면식도 아버지를 이어 의병으로 투쟁하였다. 고운 최치원의 후손인 최익현은 채산사에 모셔져 있고, 영정은 청성사에 모셨다. 전시유물은 현대로 이어진다. 사진으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1960~70년대의 포천 모습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 ‘사통팔달’ 한반도의 중심도시를 알리는 박물관 포천역사문화관은 2015년 개관한 후 ‘봉래 양사언과 형제들’, ‘나의 보물’이라는 특별전을 열었고, 지난 2021년에는 ‘포천 옛길, 전철로 잇다’라는 기획전을 준비했다. 조선 6대로 가운데 제2대로인 경흥대로(경흥길)를 중심으로 포천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그렸으나 코로나19로 시민들에게 제대로 홍보도 하지 못했다. 옛길을 주제로 한 기획이 신선하고 흥미롭다. “지도상으로 보면 포천은 한반도의 정중앙이에요. 포천선(전철7호선) 철도가 건설되는데 2027년에 개통될 것이라 합니다. 여기에 맞춘 기획이죠. 앞으로 남북관계가 개선되어 경제협력이 이루어진다면 포천은 일찍부터 상업의 중심지였듯이 물류의 중심지로 다시 주목을 받게 될 것입니다. 통일시대 한반도의 거점도시로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광릉 수목원과 한탄강을 비롯한 아름다운 자연은 포천의 자랑이다. 2019년에 개관한 한탄강지질공원센터는 국내 최초의 지질전문박물관이다. 천연기념물인 대교천 현무암 협곡과 비둘기낭 폭포와 아우라지 베개용암, 그리고 화적연과 멍우리 주상절리 협곡을 함께 둘러보면 포천의 매력에 푹 빠질 것이다. 포천의 과거와 현재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포천역사문화관은 작지만 알찬 실속형 박물관이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2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9. 포천 ‘국립산림박물관’

포천 소흘의 광릉숲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크낙새와 장수하늘소가 사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수령 200년이 넘은 아름드리 소나무를 비롯해 늘씬한 전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초록의 숲길을 따라 흥얼거리며 걷다 보니 어느새 산림박물관이다. 산림박물관을 품고 있는 광릉숲은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등재된 곳으로 500년 이상의 역사와 문화를 품고 있다. 산림청 국립수목원(원장 최영태) 산하 국립산림박물관은 가운데 정원이 있는 ‘ㅁ’자 모양의 건축이다. 박물관 외벽은 화강암에 백제시대 벽화 ‘산수 무늬 벽돌’을 현대적으로 그래픽 하여 음각한 벽화로 산과 나무, 물과 바위 구름 등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다. 박물관에 들어서니 은은한 나무 향기가 풍겨온다. 1987년 4월5일에 개관한 국립산림박물관은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풍성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지금 특별전 ‘광릉숲 속 애벌레들’이 열리고 있다. ■ 즐기고 느끼면서 숲과 나무를 배우는 곳 “우리 산림박물관의 비전이 ‘즐기고 느끼면서 배우자’입니다. 개발 콘텐츠에 정보통계기술을 접목하고 홀로그램 등의 콘텐츠 기술을 활용하여 ‘즐기는 박물관’으로 전시의 방향을 잡았지요. 입구에서 보셨나요? 해설사와 함께 하는 프로그램이 두 가지 있는데, ‘산림문화’가 5월부터 12월까지, ‘산림생명’이 7월부터 12월까지 진행됩니다. 숲과 깊이 만나도록 해설사 한 분이 관람객 5명만 안내하지요. 참, 지난해에 우수박물관 인증을 받았습니다” 이정희 실장의 말처럼 ‘관람객들이 즐기고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한 박물관의 정성이 전시실 곳곳에 스며있다. 제1전시실의 주제는 ‘살아있는 숲’이다. 날개를 펼친 독수리가 앉아 있는 거대한 느티나무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다가가서 보니 꿩, 삵, 너구리, 담비 같은 숲속 동물들의 박제도 있다. 아래에 달린 5개의 모니터에서 들꽃과 개구리와 두꺼비 등 숲의 바닥에 사는 식물과 동물들을 소개하는 영상이 비친다. 나무 허리에 설치된 모니터 3개에서는 나뭇잎과 꽃과 열매, 새와 나비와 곤충을 보여준다. “계절에 따라 바뀌는 숲의 신비로운 모습을 영상으로 감상할 수 있어요. 살아있는 나무가 참 굵죠? 이 느티나무는 둘레가 6m가 넘는데, 다섯 그루가 붙어 자란 연리목으로 산림박물관의 ‘상징목’이지요. 경북 안동의 수몰 지구에서 캐낸 것인데 수령이 150년, 키가 18m나 되었다고 해요” 나이테를 활용하여 세계사와 한국사 연표, 한국 산림 연표를 소개한 것도 이채롭다. 산림문화의 전당에는 박물관 건립에 큰 도움을 준 임목육종학자 현신규를 비롯한 네 분의 얼굴과 이력, 사료를 기증한 분들의 이름을 새겼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도 흥미롭다. 계단 왼편은 국내 수종의 판재로 만든 난간이고, 오른편 난간은 외국 수종의 판재를 전시하여 서로 비교해 보도록 했다. ■ 나무에 새긴 역사, 나무가 만든 우리 문화 제2전시실에서 나무의 모든 것을 만난다. 씨앗들이 가득한 벽에 ‘산림과 인간 생명의 근원인 씨앗’이라는 글귀를 새겨 놓았다. 전시실에 들어서자 신석기 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나무로 만든 삽이 눈에 띈다. 팔만대장경판은 고려 승려들의 불심이 얼마나 깊은지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온돌모형은 왜 전시했을까? 그렇다. ‘온돌’은 나무가 만든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이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소나무 문화가 궁금하다면 검색대에서 관련된 내용을 검색하면 된다. 일제 강점기도 빠트리지 않았다.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부족한 연료를 마련하기 위해 소나무 줄기를 파내 송진까지 수탈해간 일제는 한국인의 기상을 상징하는 백두산 호랑이까지 멸종시켰다. 해방은 되었으나 곧이어 터진 한국전쟁으로 우리나라 산은 벌거숭이가 되었다. 그러나 나무를 사랑하는 한국인의 염원은 불타올랐다. 1950년대 전후부터 산림을 가꾸기 시작하여 마침내 푸른 국토를 만들어낸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에서 유일한 녹화 성공국가로 세계가 인정한 나라가 된 배경에는 세계 최고의 산림육성기술이 있다. ■ 나무와 친해지는 법 못을 사용하지 않고 끼우고 조립하는 방법이 흥미롭다. 나무를 결합하는 방식이 참으로 다양하다. 나비장이음, 십자걸침턱짜임, 오늬쪽매...옛사람들이 가구를 만들며 개발한 기술에 붙인 이름을 하나씩 불러본다. 널뜨기, 통메우기, 이음·맞춤, 배뭇기 등 뛰어난 전통의 가공기술은 현대 목재 가공기술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나무 표면을 다듬는 대패를 비롯해 선조들의 손때가 묻은 유물들이 정겹다. 악기는 가문비나무를 주로 사용한다. 오동나무로 거문고와 가야금을 만든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장고의 몸통은 무엇으로 만들까? 역시 오동나무다. 특유의 색과 아름다운 무늬를 가진 감나무와 느티나무는 방안을 장식하는 목가구 제작에 애용되었다. 여성들이 사용한 빨랫방망이와 베틀, 물레는 물론 남성들이 사용한 지게와 쟁기 같은 기구도 있다. 나무로 만든 물건 중에서 가장 고급 기술이 필요한 것은 역시 한옥이 아닐까. 한옥 모형은 한옥의 구조와 제작과정을 한눈에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천연색 옷감이 놓인 공간이 눈길을 끈다. “자연은 온갖 빛깔을 품고 있습니다. 식물의 열매나 잎, 껍질과 뿌리에서 자연염료를 추출하여 옷을 염색했지요. 푸른빛을 내는 쪽을 비롯해 염료로 쓰이는 다양한 재료와 염색된 천을 전시한 것입니다. 옻나무와 황칠나무는 최고급의 천연도료였어요. 옻칠은 도막이 단단하고 광택이 뛰어나 애용되었고, 황칠나무는 금색을 표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유해전파 등을 흡수할 수 있다고 해요” 새끼로 꼬아 만든 멍석 위에 나무 조각들이 놓여 있다. 목조기술 체험코너 ‘손과 마음으로 만나는 목재’다. “한옥을 짓거나 전통 목가구를 제작할 때 사용되는 목재 결구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음, 맞춤, 촉매 등의 전통방법으로 목재를 짜 맞추다 보면 옛 장인들의 지혜에 절로 감탄하게 됩니다” 정말 그렇다. 나무 조각을 만지며 놀다 보면 자연스레 나무도 저만의 특성을 가졌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된다. 사람도 그렇다. 나무들이 서로 비교하거나 부러워하지 않듯이 사람들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풀이나 나무처럼 자신만의 향기와 빛깔을 가진 사람이 멋지다. ■ 우리 500년 숲에서 놀자 제3전시실 다면영상관은 산림의 중요성과 생물보전의 중요성을 영상물로 알리는 공간인데, 주제가 ‘500년 숲에서 놀자’이다. 말 그대로 아이들이 놀면서 즐겁게 숲과 나무와 친해지는 곳이다. 제4전시실 산림생명관은 우리들의 무딘 감각과 생각을 깨우는 공간이다. ‘인간과 식물의 진화’, ‘생태숲 디오라마’, ‘인간과 식물’, ‘인간과 곤충’, ‘인간과 버섯’, ‘위협받는 지구’, ‘국제협력을 통한 다양한 위협에 대한 방지 노력’, ‘광릉숲 코너’로 구성되어 있다. 영상으로 급격한 기후변화, 생물다양성 감소,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는 21세기 세계가 처한 엄혹한 현실을 만난다. 제5전시실의 주제는 ‘한국의 자연’이다. 광릉숲의 현재 모습을 디오라마와 상호작용식 검색시스템을 통해 보여주고, 광릉숲의 모습을 3D영상을 통해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광릉숲 멸종위기야생동물 증강현실로 만나요!’는 흥미 만점의 프로그램이다. 3m 높이의 잎이 풍성한 나무 두 그루와 이끼 낀 바위를 배경으로 한국호랑이와 노란목도리담비와 크낙새를 만날 수 있다. 이정희 실장이 스마트폰을 지정 마크에 갖다 대자 동물들이 살아 움직인다. 호랑이가 바위 앞에서 꼬리를 흔들며 하품하고. 담비가 바위 앞을 달리고, 크낙새는 부리로 나무를 두들기다 하늘로 날아오른다. “우리의 산림문화자산이 얼마나 풍성한지 몰라요. 관람객들에게 산림문화자산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고 이해를 높이기 위해 전시물과 연관된 흥미로운 체험 프로그램을 꾸준히 개발하고 있습니다” 숲은 역시 걸어야 제맛이다. 국립수목원은 처음 수목원을 처음 찾은 사람을 위한 ‘느티나무· 박물관길’을 비롯해 다양한 주제의 길을 개발하여 거리와 시간, 걸음 수, 칼로리 소모 정보까지 제공해주고 있다. 박물관을 다 둘러보았다면 이제 숲의 매력에 빠질 차례다. 김준영(다사리행복학교)

[2022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8. 용인 '근현대사미술관 담다'

수운 최제우 선생이 창도한 동학은 “사람이 하늘”임을 선포한 평등과 자주의 정신이다. 동학농민군은 우금치에서 패배했으나 그 정신은 25년이 지난 1919년 3·1운동으로 다시 불타올랐다. 이때 꽃 피운 자주정신은 독립투쟁으로 건국운동으로 진화했고, 민주화운동으로 열매를 맺었다.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한 한국인의 위대한 역사를 미술작품으로 증언하는 특별한 미술관이 경기도에 있다. ■미술작품과 역사가 만나다 “19세기, 인간의 존엄성이 세상에 드러나면서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민주주의의 첫 싹이 한반도에 솟아났습니다. …한반도 평화와 세계 평화를 염원하면서 이번 근현대사 특별전을 개최하였습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이듯이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바로 이 자리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의 대화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용인특례시 강남동로 140번길 1-6에 자리 잡은 ‘근현대사미술관 담다(관장 정정숙)’ 입구에 새겨진 글이다. 2019년 6월에 개관한 근현대사미술관 담다는 우리 역사의 현장을 미술작품으로 증언한다. 미술관 입구를 지키는 김대중과 노무현 대통령의 밀랍 인형은 ‘한반도 평화-거대한 움직임’이라는 작품이다. 두 분 사이에 있는 ‘남겨진 기억-3’(신상철 작)이라는 태극 문양이 한국 근현대사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듯하다. 1층 상설전시장에서 한국의 근대를 연 동학과 동학농민혁명, 3·1만세운동, 5·18민주화운동, 한반도평화와 관련된 미술작품들과 만난다.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한 우당 이회영 선생의 초상(박세라 작),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대한 남아의 기상을 세계만방에 떨친 안중근 의사의 단지한 손바닥 도장 그림(상하 작)도 있다.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혁 장군(레오다브 작)과 오광선 장군의 얼굴을 액션페인팅과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표현한 작품(이은정 작)도 인상적이다. 독립운동가들의 땀과 피가 스민 태극기가 전시된 공간에서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룩한 한국의 저력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본다. 대답을 들려주듯 북을 맨 사나이가 왼손엔 활활 타오르는 횃불을 들고 오른손엔 북채를 잡고 달려가고 있다. 전정호의 목판화 ‘북춤’이다. 민주화 투쟁이 활발했던 1980년대에는 전달력이 강한 판화가 유행했다. 홍성담, 전정호, 이상호, 안한수 화백의 작품을 통해 군부가 짓밟은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거리로 나서야 했던 어두운 시대와 마주한다. 권총에 피 묻은 태극기가 시선을 빼앗는다. 배경이 되는 거리는 광주 금남로일 것이다. ‘5월 18일 민주주의를 쏘았다’는 글귀가 주제를 선명하게 전달한다.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계엄군에게 끌려가는 시위대, 태극기에 싸인 관이 널려 있는 흑백사진은 80년 5월 광주로 데려가 준다. 상설특별전으로 전시되고 있는 작품들은 미술관을 설립한 김성인 이사장이 30여 년간 수집하여 소장해 온 작품들과 일부 화가들이 기증한 작품들이다. 김성인 이사장의 작품이 눈길을 끈다. 보라 바탕에 웅크린 태아 형상은 태동하는 시민의식을 상징하고 있다. “근현대사미술관 담다는 역사를 ‘담다’, 그림을 ‘담다’, 행복을 ‘담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조명하는 작품을 매개로 창작자와 관람객이 어울려 ‘함께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미술관이지요.” 담다는 역사학을 전공한 정 관장과 그림을 전공한 이사장 김성인 작가의 역사의식이 빗어낸 특별한 미술관이다. 두 사람은 근현대사미술관 담다가 지역사회를 넘어서 전국에서 역사를 제일 잘 알려주는 미술관이 되기를 소망한다. “역사와 관련된 그림도 보고 그 자료도 찾아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담다 미술관입니다. 개관까지 어려움이 많았어요. 작품 구매부터 보관까지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지만, 지인들의 도움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문을 열 수 있었습니다.” ■미술작품으로 동학부터 촛불혁명까지 상설전시실에서 5개의 주제로 작품을 만난다. ‘태극기변천사’는 1882년 수신사 박영효 일행이 일본으로 건너갈 때 태극사괘의 도안을 만들어간 것을 시초로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변천을 살필 수 있다. ‘태동, 동학 1860,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는 동학의 시작과 정신을 만날 수 있다. 수운 최제우 선생은 미국의 링컨 대통령보다 1년 먼저 노비를 해방했다. 수운은 두 여종 중 한 명은 며느리로 삼고, 다른 한 명은 수양딸로 삼아 ‘사람은 평등하며 누구나 존엄하다’는 동학 정신을 실천한다. ‘분출, 동학농민혁명, 1894’는 인간답게 살기 위해,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해 동학농민혁명으로 시민의식을 분출하는 당시 상황을 담은 홍성담과 전정호 작가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함성1, 3·1만세운동, 1919’는 3·1운동을 이끌었던 의암 손병희 선생과 독립운동과 통일국가 건설을 위해 투쟁했던 백범 김구 선생의 초상화를 손의식 작가의 작품으로 만난다. 이상하 작가는 안중근 의사의 손도장을 빛나는 별의 모습으로 형상화하여 암울한 일제강점기에 조국 독립을 위해 줄기차게 활동한 독립운동가의 정신을 전달한다. ‘함성2,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와 전라도에서 독재에 항거해 일어났던 민주화항쟁의 모습을 증언하고 있다. 오윤, 홍성담 작가의 판화 작품은 사진이나 영상보다 더 강력하다. ‘미래, 평화! 또 다른 시작!’은 손의식 작가의 ‘하나로- 뜨거운 포옹’과 안한수 작가의 ‘무너진 철조망’이 한반도의 평화를 염원하는 국민의 소망을 담고 있다. 근현대사미술관 담다는 시민을 대상으로 북콘서트, 인문학 강좌 등 다양한 프로그램도 기획하고 있다. 한양대 윤석산 명예교수, 경희대 임형진 교수 등이 강사로 나선 인문학 강좌 ‘동학이야기’는 담다의 지향을 보여준다. 담다에서 주관하는 독서모임 ‘용득수기’는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쓴 윤영수 방송작가를 초청해 ‘21세기와 이순신의 창조적 리더십’을 주제로 한 인문학 특강을 열고, 북한문화체험 ‘꼬리떡 만들기’를 진행하여 탈북민들과 지역주민들이 어울리는 시간을 마련했다. ■역사와 그림과 행복을 담는 열린 미술관 코로나 19가 기승을 부리던 2021년에도 담다는 부지런히 달렸다.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그림, 자유와 평화를 만나다’ 특별 전시회를 열어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들의 외침과 시대정신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게 했다. 봄에는 ‘3·1만세운동과 독립운동 특별기획전-용인, 자유와 평화를 담다’를 열었는데, 용인지역 작가를 포함해 19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정희경 작가의 ‘속삭이는 빛’ 연작은 화면에 무수히 점을 찍는 행위성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서양화가 손정순 작가 초대전 ‘자연의 향연전’과 장애인 예술가가 들려주는 음악과 퍼포먼스 ‘나의 빛 나의 음악’은 특별한 감동을 선사했다. ‘박금만 여순항쟁 특별전’은 서울경기지역에서 처음으로 여는 여순항쟁 역사화전으로 감춰졌던 현대사의 치부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기획이다. 근현대사미술관 담다는 지역예술인들과 연대하는 일에도 열심이다. 2021년 가을, 용인에 거주하거나 용인에서 문화예술활동을 하는 220여 명의 전문 예술인들이 ‘용인문화예술연대’를 출범했다. 사무총장을 맡은 정정숙 관장이 비전을 들려준다. “용인문화예술연대는 음악, 미술, 도예, 풍물, 국악, 서예 등 문화예술 전 분야로 폭을 넓혔지요. 용인예술문화연대가 주관해서 매년 1~2달에 걸친 문화예술축제를 만들 계획입니다. 용인문화예술축제를 이탈리아 베니스 카니발, 영국 에딘버러 축제와 같은 도시를 대표하는 문화상품으로 키우려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2022년 용인 꿈의학교의 거점활동공간으로 선정된 근현대미술관 담다는 학교는 물론 지역주민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담다는 미술작품을 통해 역사를 이야기하고 이웃과 소통하는 열린 미술관이다. 김준영(다사리행복학교)

[2022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7. 수원 '국토지리정보원 지도박물관'

언제쯤 자율주행 자동차가 거리를 달릴까? 드론으로 음식을 배달하려면 어떤 기술이 필요할까? 이런 게 궁금한 사람이라면 스마트폰을 꺼내 검색해 볼 것이다. 아마도 만족스런 대답을 듣긴 어려울 것이다. 보다 실감 나고 분명하게 대답을 듣고 싶다면 수원시 영통구 월드컵로 92(원천동 111)에 위치한 국토지리정보원(원장 사공호상)에 있는 지도박물관을 찾아보라. 국토교통부 소속기관인 국토지리정보원은 우리나라 지도를 제작하여 국민들에게 제공하는 일을 한다. 네이버, 다음, T맵, 네비게이션 등에 나오는 여러 가지 지도들은 이곳 국토지리정보원이 제작한 지도를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먼 옛날에는 발로 걸어 높은 산에 올라 산줄기와 강줄기의 모습을 살피고 그 안에 있는 마을들을 그렸다. 천문관측 기술이 발전한 조선 시대가 되면 별을 보고 위도와 경도를 측정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현대의 지도제작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최첨단의 기술을 사용하지만, 제작 과정은 매우 복잡하다. 먼저, 현 위치를 선정한 다음, 비행기로 GPS 항공사진을 촬영하여 사진과 실제 지상점을 일치시켜 좌표 얻어낸다. 이어 디지털 사진을 보고 지형지물을 선과 기호로 그려 1차로 완성된 지도를 가지고 현지에 가서 직접 대조해 보고 지리조사 내용 등을 입력하여 디지털지도를 최종 완성한다.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와 마주하다 원통형의 박물관 중앙홀에 들어서면 눈에 익은 지도가 걸려 있다. 관람객의 시선을 압도하는 이 대형 지도는 고산자 김정호(1804?~1866?)의 ‘대동여지도’다. 살아 꿈틀대는 산맥과 강, 고을과 고을을 잇는 상세한 도로가 경탄을 자아낸다. “사실 대동여지도는 1장의 지도가 아닙니다. 22책의 책자로 이루어져 접었다 펴는 ‘절첩식’ 지도인데, 모두 펼치면 우리나라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전체를 펼치면 세로 6.7m, 가로 4m이며 축척은 대략 16만분의 1이 됩니다. 선생님은 ‘지도유설’에서 지도를 ‘위기가 발생할 때 적을 막고, 강폭한 무리를 제거하는 데 활용하며, 평상시에는 백성을 다스리는 데 활용하는 것’이라 하셨지요. 1402년 태종 2년에 만들어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역시 한국을 대표하는 고지도인데 세계 속의 조선의 위상을 표시한 지도입니다. 반면 1861년에 만들어진 이 ‘대동여지도’는 한반도 전역을 자세히 그린 과학적인 지도로 국가 운영에 필요한 고급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한상호 학예연구사의 설명을 들으니 지도가 담고 있는 것이 지리 정보만이 아님을 분명히 알겠다. 역사관으로 들어선다. 우리나라 전도와 도별도, 도성도, 군현지도를 비롯해 서양과 일본의 고지도가 전시관을 채우고 있다. 한 학예사가 전주성을 세밀히 그린 지로를 가리키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흥선대원군은 우리나라 지도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분입니다. 한동안 김정호 선생 부녀를 처형한 인물로 알려졌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일제가 1934년에 펴낸 ‘조선어독본’의 ‘김정호전’에 병인양요가 일어났을 때 대원군은 국가의 기밀이 누설될 것을 우려하여 대동여지도 지도판을 압수하고 김정호 부녀를 옥에 가두었다가 결국 옥중에서 사망했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대동여지도 판각과 지도가 온전하게 남아 있고, 지도제작을 도운 인물들이 처벌을 받은 사실이 없습니다. 오히려 대원군은 정밀한 지도를 제작했지요. 이것이 1872년에 대원군의 명을 받아 전국 459곳의 군현에서 제작한 지도들입니다.” ■지도에 담긴 나라사랑 현대관에서 만난 지구본의 사연도 흥미롭다. 160점의 지구본 중에서 학예사가 가리키는 지구본의 색깔이 좀 특이하다.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유심히 살펴보니 아프리카 대륙과 인도와 호주와 영국이 붉게 칠해져 있다. “혹 영국의 식민지가 아닌가요.” “맞습니다. 지구의 곳곳에 영국의 식민지가 있었죠. 그래서 ‘태양이 지지 않는다’라는 말이 생겨난 것입니다.” 지구본에서도 제작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들어있다. 윤경철 박사가 2004년에 지도박물관에 기증한 것인데, 만인에게 배움의 즐거움을 제공하는 기증문화의 미덕이 느껴지는 공간이다. 대항해시대에 서양 사람들이 동해를 ‘SEA OF KOREA’로 표기했고, 울릉도를 ‘판링도’, 독도를 ‘천산도’로 불렀다. 일본사람들은 동해를 ‘조선해’로 울릉도를 ‘죽도’로 독도를 ‘송도’로 표기하였다. ‘동해’와 동해에 위치한 ‘독도’를 우리 영토로 그린 서양의 고지도가 여럿 전시되어 있다. 또렷하게 ‘조선해’라 쓰인 일본의 고지도를 보며 국제사회에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할 것을 주장하고 독도를 자국의 영토라 강변하는 이웃에 둔 우리의 처지와 자세를 생각해본다. 현대관의 중심 주제가 ‘독도’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광복 이후 제작된 독도 지형도에서 우리 영토를 지키기 위한 지도제작자들의 단호한 의지가 느껴진다. 독도에 20개의 이름을 가진 바위섬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작은 바위섬에도 이름을 붙인 까닭이 무엇일까. 지도는 이름, 소유권자를 분명히 인식하게 해 주는 것이다. ■무인자동차가 다니는 지도를 어떻게 만들까 지도를 제작하는 기계에 대해서도 알아본다. 거리와 위치를 측량하는 것을 ‘각측량기’라 하고, 높이를 측량하는 것을 ‘레벨’이라 한다. ‘3D 지도’는 무엇일까. 2차원의 평면 지도에 높이와 속성, 색깔 등 다양한 정보를 결합하여 제작한 3D 지도는 현재 대도시 30개 지역이 구축되어 있다. 디지털지도는 ‘오토캐드’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야 볼 수 있으므로 접근이 어렵다. 그래서 관람객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PDF 형태’의 지도로 만든 것이 ‘온맵’이다. 이런 지도가 구축되면 자동주행차와 드론이 우리의 일상에 들어올 것이다. 지도로 통일을 대비하고 있다는 사실도 신선하다. 2007년부터 통일을 대비하여 북한 전지역을 1/50,000 축척으로 계속 제작하고 있다. 오늘의 북한을 볼 수 있는 지도책을 펼치며 통일의 꿈을 꾸어본다. “아직도 후진국들은 자기 나라의 지도가 없어 국가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지요. 국토지리정보원에서는 해마다 우리 국토 전역을 비행기로 사진 촬영하고 그 사진에 위도, 경도, 높이, 지명 등 다양한 정보를 입력하여 지도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국토지리정보원이 만든 지도를 네이버, 다음 등 포털사이트나 네비게이션 회사들이 구입 및 편집하여 상품으로 판매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치지형도, 3차원지도, 온맵은 무엇일까. 수치지형도는 컴퓨터(오토캐드)로 볼 수 있는 디지털 지도를 말한다. 3차원지도는 영화처럼 도시 전체를 입체로 볼 수 있는 지도이며, 온맵은 쉽게 볼 수 없는 수치지형도를 PDF파일로 만들어 쉽게 보는 지도다. 이렇게 만든 여러 가지 지도를 편집하여 토양의 성질을 표시한 지질도, 관광 명소를 표시한 관광지도, 비행기, 선박이 다니는 길을 표시한 항공지도, 해양지도를 만들고 있다. 정밀도로 지도는 자율주행차의 안전한 운행을 위해서 도로와 주변시설의 정보를 3차원으로 표현한 첨단지도다. 2004년 11월에 개관한 지도박물관은 1종 전문박물관으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교육도 활발히 펼치고 있다. 전국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지도 그리기 대회를 열고 있는데, 전시된 그림에서 아이들의 반짝이는 창의성을 엿보는 즐거움도 크다. 박물관은 중학생과 고등학생들에게는 지리교육을 실행하고 있다. 궁금하다면 지도박물관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라. ‘어린이 지도여행’을 클릭하면 금방 지도와 친해질 수 있을 것이다. 지도에 관심을 가진 성인들에게도 매우 유익한 정보가 들어있다. 야외 전시장을 찾아 김정호 선생 동상 앞에 선다. 후손들에게 한국인의 긍지를 심어준 위대한 선각자 앞에 머리 숙여 존경을 표한다. 동상 옆에 대한민국 경위도 원점을 표시한 특별한 시설이 있다. 지구상의 위치는 경도와 위도로 나타내는데 대한민국이 경위도 상에서 어디에 위치하는지 측량한 ‘대한민국 경위도 원점’이다. 대한민국 경위도 원점은 우리가 보는 지도를 그릴 때 늘 기준이 되는 점이다. 평면 위치의 기준을 측정하는 삼각점과 높이를 측정하는 수준점도 확인할 수 있다. 지도박물관은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상상하는 즐거운 공간이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2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6. 오산 '유엔군 초전기념관'

우크라이나 전쟁이 웅변하듯 세상은 평화를 바라지만 전쟁은 끊이지 않는다.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을 겪은 우리에게 평화보다 더 소중한 것은 달리 찾을 수 없다. 유엔군 초전기념관과 스미스 평화관이 있는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은 우리에게 전쟁의 참혹함과 평화의 소중함을 알려주는 공간이다. ■오산 죽미령 전투를 기억하는 까닭 1950년 7월 5일, 오산 죽미령에서 유엔의 결의에 따라 선발대로 파병된 미국 제24사단 소속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원 540명이 북한군과 6시간 15분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이 첫 전투는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여 반격에 나설 수 있게 한 터닝포인트였다. 한국전쟁 때 벌어진 수많은 전투 중에서 죽미령 전투를 특별히 기억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2012년에 죽미령 전투의 중요성을 인식한 오산시(당시 시장 곽상욱)에서 미국에 흩어져 있던 참전 용사들을 찾아 나선다.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는 일에 목숨을 걸었던 노병들을 찾아내 그들의 용기와 희생에 감사하며 생생한 목소리를 기록한 것이다. 참전 용사들도 자신의 젊음을 바친 나라에서 찾아온 사람들에게 자신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기념물을 기꺼이 기증한다. 이러한 노력과 정성으로 2013년 4월, 마침내 유엔군 초전기념관이 문을 연다. 오산시의 혜안과 노력이 빛을 발한 것이다. 일본에서 평화유지군 역할을 하던 스미스 부대는 한시라도 빨리 한국 전선에 기동성 있게 투입하여 북한국의 남침을 조기에 지연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대대급으로 꾸려졌다. 이 규모는 긴박한 상황에서 공중 및 해상 수송을 통해 가장 빨리 파견될 수 있는 미 지상군의 최대 규모였다. 1955년 7월 5일 죽미령에 건립된 유엔군 초전기념비는 이 전투를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미합중국군대와 공산침략군 간의 최초의 전투를 개시했음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비를 세우노라.” 1982년에 신 유엔군 초전기념비를 건립하는데 국가보훈처로부터 현충시설로 지정된다. 2013년 4월에 유엔군 초전기념관을 개관하고, 5월에 국가보훈처가 현충시설로 지정하며 8월에 유엔군 초전기념관을 공립박물관으로 등록한다. 2020년 7월 5일에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과 스미스 평화관을 개장하면서 유엔군 초전기념관은 더욱 주목을 받게 된다. 죽미령 유엔군 초전기념관은 이름 그대로 ‘첫 전투를 기념하는 공간’이다. 첨단 기술을 응용하여 실감 나게 구성한 전시실을 관람하고, 공원 주변에 설치한 기념물을 둘러보면 자연스럽게 ‘감사’와 ‘평화’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첫 전투가 벌어졌던 현장에서 평화를 이야기하다 초전기념관 고아라 국장의 안내로 평화공원부터 둘러본다. 차를 타고 밖에서 볼 때와 달리 공원의 규모가 생각보다 훨씬 크고 구성도 알차다. ‘워터커튼’이라는 이름의 철판으로 제작한 구조물 앞에 선다. “이게 무엇인지 아시겠어요? 여기 영문으로 촘촘하게 새겨진 것은 죽미령 전투에 참전한 540명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원들의 이름입니다. 전투가 벌어진 날에 비가 내렸다고 해요.” 전투가 벌어진 날 비가 내린 사실이 기념물에 반영될 정도로 전쟁의 기억은 참혹하다. 벽에 구멍을 뚫어 네 명의 군인이 걸어가고 있는 형상을 한 조각은 ‘거울연못’이다. “전장으로 향하는 용사들의 모습이 물에 그림자가 지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시계처럼 보이는 둥근 조각의 중앙에 있는 꽃은 꽃말이 ‘감사’인 다알리아인데 참전 용사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의미를 담고 있단다. ‘더글라스 C-54 조형케이트’는 스미스 부대가 한국으로 올 때 타고 온 수송기 모양을 본떠 만든 것이다. 공원 가장 안쪽에 아주 중요한 기념물이 서 있다. 앞에 소개한 경기도 지정 문화재 제3호로 지정된 구 유엔군 초전기념비다. “스미스 부대원들을 상징하는 540개의 돌로 만들어진 것인데 특별한 사연이 있습니다. 1964년 기념비에 부착된 동판이 사라졌다고 해요. 고가의 청동을 누군가 떼어 간 것이죠. 그런데 1977년 미국 하와이의 골동품 가게에서 우연히 한국인 지갑종 씨가 발견하고 입수합니다. 이 분이 기념관에 기증했기 때문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죠.” 유엔 참전국 16개 나라의 국기를 단 평화놀이터는 편을 나누지 않고 모두가 어울려 노닐 수 있도록 넓은 부지에 다양한 놀이를 즐길 수 있다. 화성과 수원을 바라볼 수 있는 죽미령 전망대에 오르면 북쪽을 바라보며 서 있는 스미스 중령의 동상도 볼 수 있다. ■유엔군 초전 기념관에서 전쟁을 기억하다 2013년 4월에 개관한 유엔군 초전기념관에는 150건 249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상설전시실의 주제는 6·25전쟁의 발발 과정과 UN 평화유지군의 창설, 참전과정부터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의 죽미령전투 진행과정을 소상히 알 수 있도록 사진과 영상, 문서 및 스미스 부대원들의 기증자료로 구성된 기록 보관소이다. 죽미령 전투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알려주는 영상물이 단박에 과거의 현장으로 안내한다. 6시간 15분의 죽미령 전투의 진행 상황을 실감 나게 전달한 영상을 보니 비로소 스미스 부대가 왜 이 지역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는지, 북한군의 진격 상황과 전투가 벌어진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커다란 흑백사진 한 장이 벽면을 채우고 있다. “전투 사흘 전인 7월 2일 대전역에 도착한 스미스 부대를 촬영한 사진입니다. 뒤에 있는 병사들의 얼굴까지 식별할 수 있으니 참 놀랍죠?” 엄숙한 추모의 공간이 이어진다.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원 그들을 기억합니다’라 새겨진 글귀 아래에 가득한 동판 하나에는 이름과 사진과 소속과 계급, 전사 여부를 알려주는 인적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540명의 부대원 중에서 전사가 56명, 포로가 89명이 발생했으니 그날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짐작된다. “기념관은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참전 용사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75밀리 무반동총, 2.36인치 로켓발사기, M1 소총, 4.2인치 박격포 같은 무기와 참전 당시 입었던 군복, 군화, 인식표, 철모, 대대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잊히지 않는 것은 개막식에 초대된 스미스 부대원들의 표정이 담긴 사진이다. 고령이라 대부분 휠체어를 탄 모습이지만, 감사를 잊지 않고 자신들을 초대해 준 한국인들의 태도에 감동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스미스 평화관에서 전쟁을 실감 나게 체험해 볼 수가 있다. C-54 더글라스(VR) 1950년 7월 1일 일본 후쿠오카에 소재한 이타즈케 공항을 출발하여 부산 수영 비행장으로 떠나는 과정을 1인칭 시점의 VR로 체험할 수 있다. 부산의 수영 비행장에서 대전역까지 기차를 타고 이동한 스미스 부대원들의 발자취를 따라 이동하며 아직은 평화로운 부산에서 대전간 열차 안에서 당시 우리나라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스미스 부대가 7월 1일 아침, 이타즈케 공군기지를 떠나며 받은 임무는 ‘경부국도를 따라 북진하여 가능한 한 북쪽에서 적의 침공을 최대한 저지하라’는 것이었다. 한국 전선에 가장 먼저 파병된 스미스 부대는 ‘서부지역 지연 작전’에 최초로 투입된 부대로 기록되었다. LED 조명으로 빗발치는 총격 장면을 연출하여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생생하게 느껴볼 수 있다. 체험 내용을 마무리 짓는 4면 영상이다. 이제는 90대가 된 스미스 부대원인 나. 나의 참전은 무엇을 남겼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며 자유와 평화에 대해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죽미령에서 울려 퍼지는 평화의 메시지 유엔군 초전기념관은 죽미령 전투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기억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이 담긴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이다. 추모와 감사의 공간이며 전쟁 관련 소장품과 역사 연구를 통하여 선양사업을 추진하는 연구기관이다. 아울러 지역사회의 발전과 평생교육을 실천하는 교육공간이며 다음 세대에게 희생의 의미와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소통의 공간이다. 우리는 여전히 분단된 나라에 살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죽미령 평화공원을 찾아 우리가 어떻게 평화를 되찾고 번영을 이룩할 수 있었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2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5. 안성 ‘한국조리박물관’

가까운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는 시간은 삶에서 빠트릴 수 없는 행복한 순간이다. 우리 시대의 음식은 영양가보다 “맛”이 가장 강력한 선택의 조건이 되었다. 양식은 맛과 분위기를 매우 중시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양식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서양 요리 100년의 역사를 만나는 시간 여행 안성시 일죽면에 자리한 한국조리박물관에도 봄이 무르익고 있었다. 박물관 1관 입구 벽면에 새겨진 “한국 서양조리 100년의 역사를 만나는 시간여행”이란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한국조리박물관(관장 최수근)은 국내 최초일 뿐 아니라 프랑스와 미국을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개관한 1종의 조리전문박물관이다. 자국의 음식문화를 일찍부터 세계에 알려온 중국이나 일본보다 한국이 조리박물관을 먼저 세웠다니 놀랍다. 이 엄청난 일을 실현한 설립자의 생각과 철학은 무엇일까. 조리박물관 1관과 2관, 연회장에 세미나실까지 갖춘 조리박물관 건물 앞 벚나무 아래 놓인 벤치에 최수근 관장과 마주 앉았다. 한국인 1호로 프랑스 요리학교 ‘르 꼬르동 블루’에서 공부한 최수근 관장은 유명 호텔을 거쳐 식품학 박사로 영남대와 경희대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학계와 업계에 ‘소스의 대가’로 알려진 최 관장은 두 번의 운명적인 만남을 들려주었다. “1983년 조리에 대한 열망을 안고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지요. 프랑스에서 공부할 때 전 세계 조리인들에게 영감을 준 조르주 오귀스트 에스코피에(1846~1935)의 이름을 건 에스코피에박물관을 찾았는데, 그 분의 업적과 삶을 잘 보존해 놓은 박물관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곳에서 ‘나도 조리의 역사를 집대성하고 조리인에게 힘이 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1984년부터 수집을 시작했지요. 현장을 거쳐 대학에서 제자를 가르치며 30여 년 동안 수집한 소장품이 1,200여 점이 되었으나 실현은 요원하더군요. 단지 꿈으로 끝나는 것은 아닐까 염려하던 2015년 어느 봄날, 문화와 교육에 큰 관심을 기울이던 ㈜HK 이향천 대표를 만났습니다. 박물관을 설립하려는 나의 꿈을 이야기했더니 놀랍게도 이 대표가 크게 반겨주시더군요. 이 대표는 저의 오랜 꿈을 현실로 만들어주신 분입니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개관한 한국조리박물관 박물관 설립이 구체화 되어가자 조리 관련 전시품들이 더욱 필요해졌다. 이때 국내 조리 분야의 원로와 명장들이 기꺼이 최 관장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박물관 설립에 대한 자문과 더불어 귀중한 자료를 기증해 주고 고증해 주었다. 2016년에 자문위원회를 조직하여 박물관 설립은 박차를 가해 2019년에 박물관 설립계획 승인을 거쳐 2020년 10월 사립박물관으로 정식 등록되었다. “한국조리박물관은 한국 조리문화 발전에 이바지한 선배 조리사들의 업적을 충실히 기록하고 기억하는 공간입니다. 박물관에 소장된 수많은 자료 속에는 한 개인의 삶과 철학이 오롯이 담겨 있지요. 한평생을 조리분야에 종사하며 조리를 발전시킨 선배 조리인들의 땀과 발자취가 선명히 남아 있습니다. 그 발자취는 많은 후배 조리인들의 가슴에 깊은 울림이 될 것이라 기대합니다. 한국조리박물관이 지나간 100년의 역사는 물론 다가올 100년, 그 이후의 시간까지 써 내려가는 세계 3대 조리박물관으로 도약하기를 희망합니다. 무엇보다 조리에 꿈을 가진 청소년에게 비전을 주고, 조리 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자긍심을 주고 싶습니다. 물론 일반 관람객들에게는 흥미로운 요리의 세계로 안내해 줄 것입니다.” 설명을 들으니 박물관 전시실이 더욱 궁금해진다. 자리를 옮겨 박물관에 들어선다. 박물관에는 문화관광해설사가 배치되어 있으니 해설을 요청하면 안내를 받을 수 있다. 이날은 특별히 배정민 학예사가 시간을 내주었다. ■여덟 개의 테마로 이루어진 박물관 박물관은 국내 서양 조리역사의 발전사를 한눈에 파악하도록 시기별, 주제별, 인물별로 전시관을 구성하고 있다. 흑백사진 한 장이 눈길을 끈다. 대한제국 시기 독일인 여성 손탁이 경영한 손탁호텔이다. 조리역사와 호텔의 역사는 맞물려 있다. 그 사진 앞에는 우아한 주전자와 고급 컵, 티스푼이 놓여 있다. 그 시대를 증거하는 유물들이다. 아주 특별한 유물도 만나볼 수 있다. ‘탄피 깍지’는 한국전쟁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조리에 특별한 관심이나 조예가 없어도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도록 동선을 재미있게 구성하였다.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가끔 생각에 잠긴다. “이 맛있는 것을 누가 어떻게 만들었을까?” 조리사가 일하는 “주방 너머의 세계”는 무척 흥미로운 공간이다. 조리역사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역시 레시피를 유물이다. 셰프가 즐겨 본 책, 사용한 칼, 국제대회에서 받은 금메달과 은메달, 청와대에 출장 갔을 때 들고 간 칼세트도 볼 수 있다. 이름만 대면 한국인 모두가 알 수 있는 대기업 회장의 메뉴판은 한국 조리의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2층 전시실은 학생들이 좋아하는 공간이다. 식음료 발전사에서 커피와 와인의 발달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커피의 원재료를 만져보고 냄새를 맡아볼 수도 있다. 와인관은 호텔에서 종사했던 소믈리에들이 기증한 유물로 가득하다. 붉은색 의상이 강렬한 빛을 발하는데 한국소믈리에의 아버지로 불리는 분의 유물이란다. 한 병 가격이 1천만 원이나 되는 와인도 볼 수 있다. “이 공간은 아이들이 가장 재미있어하는 공간이에요. 술은 몰래 마셔야 더욱 맛있기 때문일까요? 하하, 고1들이 많이 오는데, 제발 술은 2년 기다렸다 성인이 되면 마시라고 권하죠.” 대통령은 만찬 때 어떤 음식을 먹을까. 그런 궁금함을 풀어주는 공간도 있다. “이것은 유명 셰프들의 비망록입니다. 생존했을 때는 동료들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자신만의 비밀기록이지만 이제는 누구나 볼 수가 있습니다. 엄청난 량의 레시피 노트가 우리 박물관의 자랑입니다. 메뉴판은 작품이나 다름없습니다. 요리는 먹으면 사라지지만 메뉴판은 남아 있거든요.” 조리도구는 어떻게 진화해 왔을까? 프랑스에서 개발한 압력밥솥은 조리도구의 진화를 웅변해주는 흥미로운 유물이다. 엄청난 크기의 채칼도 있다. 주름이 가득한 조리사의 모자가 있다. 주름의 숫자가 계란을 사용할 수 있는 개수를 나타낸다는 사실도 재미있다. 역시 가장 주목되는 곳은 한국조리박물관의 탄생의 계기가 된 프랑스의 위대한 조리사 조르주 오귀스트 에스코피에의 오븐을 재현한 공간이다. 배 학예사가 재미있는 일화를 들려준다. “개관했을 때 프랑스에서 우리 것을 모방한 것이 아니냐며 항의를 들었다고 해요. 그러나 사실 이곳이 처음이거든요. 사실을 알게 된 프랑스와 지금은 긴밀하게 교류하고 있으니 최 관장님의 높은 안목에 경탄하게 됩니다.” 프랑스의 요리 수준을 한 단계 올린 인물의 모습이 궁금했는데, 배 학예사가 여러 사람과 찍은 흑백사진을 가리킨다. “에스코피에란 분은 키가 매우 아담한 분이셨어요.” 유기로 유명한 안성은 대장간이 유명하다. 한국의 조리도구는 대장간에서 만들어졌다. 숭례문 복원할 때 못을 만든 장인이 기증한 칼은 세계적으로 한류를 일으킨 드라마 ‘대장금’에서 사용했던 칼이다. ■조리계의 원로와 명인이 힘을 더하여 더욱 빛나는 명품박물관 음식의 재료와 어우러져 맛, 향기, 영양, 색감을 더하고 식욕을 촉진 시키기 위해 사용되는 향신료와 소스를 이해하는 것은 조리사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오감을 자극하는 각종 향신료의 기능과 형태를 관찰하며, 동서양 음식의 풍미를 더 해주는 소스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다. 박물관의 최고 자랑은 ‘자문위원회’이다. 한국 조리분야를 대표하는 한식, 양식, 중식, 일식 제과분야 원로 및 명장으로 구성된 46인의 자문위원은 박물관 설립에 뜻을 같이하고 소장품 기증은 물론 박물관 운영 전반과 향후 박물관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 자문과 정책제안을 해주고 있다. 한국조리박물관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개관한 조리박물관답게 흥미로운 유물과 풍성한 이야기를 간직한 박물관이다. 앞으로 요리를 희망하는 학생이나 현재 관련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은 물론 요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은 찾아봐야 할 명품박물관이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2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4. 김홍도미술관

안산이 기른 불세출의 화가, 단원 김홍도 단원 김홍도(1745~1806 이후)는 한국인 누구나가 사랑하는 화가이다. 그렇다면 단원 김홍도를 가장 사랑하는 도시는 어디일까? 그렇다. 단원구가 있는 안산시라는데 이의가 없을 것이다. 단원 김홍도가 안산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예닐곱 살의 김홍도가 안산에 30여 년을 살았던 표암 강세황(1713~1791)에게 그림을 배웠다는 사실이 <표암유고>에 실려 있다. 표암은 이렇게 증언한다. “단원은 어렸을 적부터 나의 집에 다녔다.”, “단원은 젖니를 갈 때부터 나의 집에 드나들었다.” ■안산, 단원 김홍도를 키운 도시 문화관광부는 1991년도에 안산시를 '단원의 도시'라 명명한다. 안산시는 단원의 도시이자 문화예술의 도시로 발전시키기 위해 1999년부터 매년 10월이면 ‘단원미술제’를 열고 있다. 2013년 4월, 노적봉 기슭에 단원미술관을 개관한 이후 조선 최고의 화가 단원 김홍도의 예술정신과 작품을 유산으로 지역 미술 활성화에 노력해 왔다. 2016년에 1종 미술관으로 등록한 단원미술관은 지난 2022년 3월에 ‘김홍도미술관’으로 개명하였다. 안산문화재단(대표 김미화)은 단원미술관을 김홍도미술관으로 바꾼 까닭과 장래의 계획을 이렇게 밝힌다. “김홍도미술관은 안산시가 소유하고 있는 고미술 23점과 고 장성순, 고 성백주 화백의 기증품을 소장품으로 등록하고 단원 김홍도에 관한 연구기능과 자료 저장 기능을 강화하려 한다. 지역 작가의 동시대 미술을 재조명하는 사업과 안산에서 활동했던 옛 예인들과 김홍도가 교류했던 우리 미술관이 위치한 노적봉에 대한 공간 브랜딩을 준비하고 있다. 시민들이 김홍도 관련 콘텐츠와 현대미술을 쉽게 향유할 수 있도록 내실 있는 전시기획을 통해 미술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 것이다.” 단원을 김홍도로 바꾼 뜻은 다음 설명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소년 김홍도가 성포리 너머 서호를 바라보고 노적봉을 찾았던 안산의 예인들을 마주하면서 세상을 담기 시작했듯, 김홍도미술관은 소년 김홍도의 이러한 자세와 안산 시민들을 스승으로 세상을 담고 그리겠다.” 김홍도미술관 1관과 2관은 전시공간이고, 3관이 ‘단원콘텐츠관’이며 4관은 ‘상상미술공장’이다. 현재 ‘호랑이는 살아있다’(1관)와 ‘동서남북 호랑이 수호전’(2관)과 ‘단원과 표암’(3관) 전시가 열리고 있다. 단원콘텐츠관은 김홍도미술관이 소장한 단원의 그림을 전시하고 단원의 예술세계를 쉽고 재미있게 이해하도록 정성을 기울인 공간이다. 첨단 기기를 설치하여 단원의 작품과 안산에 살았던 예인들의 작품을 화면으로 만날 수 있도록 꾸민 것이 돋보인다. 단원 김홍도의 스승인 표암 강세황은 심사정, 최북, 허필 등과 교유관계를 이어가며 조선 후기 화단을 이끌었다. 안산은 성호 이익이 은거하며 안정복, 권철신을 비롯한 수많은 제자를 기른 학문의 고장이기도 하다. ■김홍도미술관에서 만나는 단원의 마음 김홍도의 그림은 웃음과 위안을 선사한다. 그가 남긴 그림은 우리 선조들이 살았던 풍경과 문물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단원의 그림이 당대는 물론 200년이 지난 오늘까지 사랑을 받는 까닭이다. 단원콘텐츠관에서 귀한 그림 한 점을 만난다. “최근에 사들인 진본인데,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렇게 자세하고 친절한 설명을 붙여두어 그림을 깊이 감상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단원 김홍도와 표암 강세황과의 사제 관계는 참으로 아름답게 이어졌다. 강세황처럼 제자에 대한 글을 많이 남긴 스승은 세계 회화사에서도 찾기 어렵다. 강세황을 스승으로 만난 것은 김홍도에게 큰 복이었다. 김홍도는 국왕 정조의 사랑도 듬뿍 받았다. 500년 조선역사에서 김홍도처럼 왕에게 사랑을 많이 받은 화가도 달리 찾기 어렵다. 표암은 단원에게 삶의 여유와 해학까지 물려줬다. 2021년 안산시 소장 진본전 ‘표암과 단원’은 40년 세월을 스승과 제자, 동료이자 지기(知己)로 함께 하며 조선의 문예부흥기를 이끈 두 예인을 조명한 것이다. 단원콘텐츠관에서 만나는 ‘공원춘효도’(貢院春曉圖)는 매우 귀중한 작품이다. 김상미 학예사가 그림에 얽힌 흥미로운 사연을 들려준다. “과거 시험장 풍경인데 시간적 배경은 새벽입니다. 과거 시험장이 ‘공원’이고, ‘춘효’는 봄날 새벽이란 뜻이지요. 전국에서 모여든 거자(擧子:수험생)들이 전날 과거장에 입장하여 우산 밑에서 밤을 꼬박 새우며 과거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풍경입니다.” 성호 이익과 그의 제자들은 과거제도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개선을 촉구했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제도였기에 개혁 군주인 정조도 고치지 못했던 모양이다. 안산 학풍의 영향을 받은 김홍도는 이러한 내용을 풍속화에 아주 사실적으로 담아낸 것이다. 우산의 행렬을 서양의 원근법을 이용하여 표현한 것도 흥미롭지만 수험생과 그 일행들의 행동과 다양한 표정이 재미있다. 그림 상단을 보면 표암 강세황이 작품에 대한 화평을 적은 종이가 덧붙여 있다. 이런 형식의 김홍도 풍속화는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도 있는데, 한 병풍에서 분리된 작품들로 보고 있다. 단원이 30대 초반에 제작한 ‘공원춘효도’는 정조시대 과거장 풍경을 담은 그림으로는 유일하며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콘텐츠관에서 만난 문화예술교육사 정미영 선생은 단원 김홍도를 너무나 좋아하여 문화관광해설사까지 시작한 단원 예찬론자이다. 단원을 사랑하는 멋진 예술인과 만나 단원을 이야기하는 즐거움은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안산에서 만난 호랑이 소나무 아래 눈에 불을 켠 듯한 커다란 호랑이를 기억하는가? 단원의 대표작인 ‘송호도’는 스승 표암 강세황과 함께 작업한 작품으로 스승은 소나무를 그리고 제자는 호랑이를 그렸다. 올해 2022년 임인년은 호랑이해다. 김홍도미술관에서도 지난 3월 25일부터 ‘2022년 전시공간 활성화 지원사업’으로 국민체육진흥기금을 지원받아 “호랑이는 살아있다”전을 진행하고 있다. 코리아나미술관의 기획으로 진행되는 이번 특별전의 의도를 들어본다. “우리나라 건국신화인 ‘단군 신화’에 등 장하기도 하는 호랑이는 수천 년의 역사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의 풍습과 문화, 정서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단원의 대표작인 ‘송호도’를 떠올리시면 우리 미술관에 호랑이를 주제로 한 그림전이 단원과 잘 어울리는 주제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5월 22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에서 황종하, 김기창, 서정목, 유삼규, 오윤, 이은실, 이영주, 한주예슬, 제시카 세갈, 필립 워널 등 국내외 작가의 작품을 두루 만날 수 있다. 회화만이 아니라 영상과 설치미술까지 구성된 복합전시이다. 김기창, 오윤의 작품에 눈길이 쏠린다. 두 발로 서서 더덩실 춤을 추는 요절 작가 오윤의 호랑이, 눈을 부라리며 노려보는 운보 김기창의 부리부리한 호랑이가 익살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웃음과 해학으로 고난을 이겨낸 한국인의 여유로운 품성 때문이 아닐까. 2관에서는 화가의 길을 걷고 있는 배우 김규리의 “동서남북 수호전”이 열리고 있다. 금요일 4시, 작가가 미술관을 찾아 자신의 작품 하나하나를 관람객들에게 친절하게 안내해 준다. 그림을 시작하게 된 사연부터 자신이 주목한 주제와 표현 기법까지 아주 자세하고 재미있게 풀어낸다. 그림 못지않게 이야기 솜씨도 빼어나다. “2008년에 개봉한 ‘미인도’라는 영화 보셨어요? 제가 혜원 신윤복 역을 맡았는데, 대역이 있었지만 주연 배우로써 그림의 기초도 없다는 것이 너무 속상했어요. 그래서 붓을 잡게 된 것이죠.” 혜원 신윤복은 단원과 쌍벽을 이루는 풍속화로 단원과 짝을 이루는 화원이 아닌가. 5월 8일까지 열리는 “동서남북 호랑이 수호전”에 등장하는 김규리의 호랑이는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환상적인 매력을 내뿜는다. 김홍도미술관을 품고 있는 노적봉은 눈부신 꽃들과 연둣빛 새잎으로 축제를 벌이고 있다. 스승과 제자 사이인 표암과 단원의 나이는 무려 32세나 차이가 났지만 서로 지음(知音)이 되었다. 노적봉 산책로는 서로에게 기쁨과 보람이 되어준 두 사람의 아름다운 사귐을 가슴으로 느끼기에 더없이 좋은 우정의 길이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2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 수원광교박물관

광교신도시에 자리 잡은 수원광교박물관은 매화꽃 향기가 가득하다. 세상은 뒤숭숭하지만, 시냇가로 난 산책로를 따라 손을 잡고 걸어가는 노부부의 뒷모습이 평화롭다. 벤치에 앉아 차를 마시는 젊은 여성들과 수령 400년이나 된 느티나무 아래에서 몸을 풀고 있는 머리 희끗희끗한 남성의 몸짓이 여유롭다. 자연의 멋을 살린 13만㎡의 광교역사공원 안에 자리 잡은 수원광교박물관에도 봄기운이 출렁인다. 앞으로 창룡대로가, 뒤로 영도고속도로가, 옆으로 광교로가 나 있으니 수원시민이라면 대부분 수원광교박물관을 한두 번쯤 보았을 것이다. ■추억과 희망이 공존하는 마을, 광교 광교신도시를 개발하던 경기도시공사가 2011년부터 사업비 178억 원을 들여 지하 1층, 지상 2층, 연면적 4085㎡ 규모의 박물관을 건립하고 수원시에 기부하여 개관한 것이 2014년이다. 수원광교박물관 1층에는 광교역사문화실을 비롯하여 어린이체험실, 다목적실이 있고, 2층은 기증유물관으로 소강실과 사운실이 배치됐으며, 지하 1층에는 수장고와 보존처리실이 있다. 광교역사문화실은 광교신도시의 옛과 오늘을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전시실에 들어서면 관람객의 눈을 사로잡는 유물이 있다. 양반가의 안주인이 입었을 푸른 저고리에 붉은 치마 곧 ‘녹의홍상’이다. 국화문양이 정교하게 직조된 치마에서 양반사대부가의 격조가 느껴진다. 유중현 학예사에게 유물에 얽힌 사연을 청한다. “2008년에 영통구 이의동 현재 광교중학교 부근에 있던 안동김씨 선산에서 이장 작업을 하던 중에 의상이 출토되었는데 무려 32점이 수습되었습니다. 수원지역에서 복식유물이 처음으로 출토된 것이지요. 이처럼 광교신도시의 중심인 이의동은 안동 김씨라는 유력 가문이 500여 년 동안 살아온 유서 깊은 마을입니다.” 박물관에서 자주 만나는 고문서나 도자기보다 화려한 의상에 시선이 쏠리는 것은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광교신도시는 영통구 이의동을 중심으로 하동과 용인시 상현동 일부가 속하는 광교산 남쪽 자락에 해당합니다. 이곳에 수원지역의 오랜 역사를 간직한 여러 마을들이 자리하고 있었지요. 급속하게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옛사람들의 숨결과 정신이 담긴 정취 있는 마을들은 하나둘 사라지고, 어릴 적 풍경은 기록으로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추억 속의 광교와 나날이 변모해가는 신도시 광교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설명을 들으니 한결 공간이 편안하게 느껴진다. 이곳에도 빗살무늬토기가 있다. 빗살무늬토기는 야외의 고인돌과 함께 광교의 오랜 역사를 보여준다. 선사시대의 유물부터 삼국과 고려와 조선의 유물을 살피다가 사연 많은 한 점의 유물과 마주친다. 태종대에 영의정을 지낸 세종대왕의 장인 심온(1375~1418) 선생의 묘 앞에서 세웠던 표지석이다. 상왕 태종은 외척들이 아들 세종의 앞길을 막지 못하도록 사돈인 심온을 제건햇던 것이다. 세종시대의 안정과 찬란한 업적은 아버지 태종의 무자비한 숙청이 없었다면 가능했을까. 나라의 안정을 위해 희생된 심온은 문종대에 복권되었는데 묘표를 세종의 셋째아들 안평대군이 썼다. 명필로 명성을 떨친 안평대군은 둘째 형 수양대군에게 목숨을 잃었다. 왕좌는 동기조차 죽일 만큼 비정하다. 무심코 지나치는 유물 하나에도 이렇듯 사연이 많다. 매장유물을 발굴하는 고고학자들의 모습을 인형으로 재현한 작은 공간에서 생생한 현장감이 느껴지는 것은 광교에서 발굴한 유물이 함께 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의동 주민들이 사용했던 지게와 절구 같은 생활 도구를 통해 신도시로 개발되기 전 광교가 한적한 농촌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영상으로 광교의 여러 마을에서 이루어지던 풍속과 문화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광교신도시의 중심인 이의동 역시 보리밭과 고추밭이 펼쳐졌던 시골 동네였다. 1980년대만 해도 초상이 나면 꽃상여를 멨을 정도였고 1990년대까지 줄다리기가 벌어졌다. 길마재와 독바위 사람들이 음력 1월 16일에 모여 벌인 줄다리기의 형식이 흥미롭다. 어른 남자는 동쪽 줄(숫줄), 여자와 총각, 어린아이는 서쪽 줄(암줄)을 맡았는데 항상 서쪽 편이 이기도록 약속되었다. 암줄이 이겨야 풍년이 들고 재앙을 쫓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불과 30여 년 전만 해도 유월이면 이의동에는 황금빛 보리가 출렁이는 정겨운 풍경이 펼쳐졌다니 놀랍지 않은가? 우리 아이들에게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사셨던 시대를 보여주는 근현대유물이 더욱 궁금할 것이다. 박물관 2층 특별전시실인 사운실(410㎡)에는 사운 이종학(1927~2002) 선생이 기증한 유물 2만여 점이, 소강실(681㎡)에는 소강 민관식(1918∼2006) 선생의 기증한 유물 3만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관람객이 ‘삼국접양지도‘를 관람하고 있다. 일본인 하야시 시헤이가 제작한 해당 지도는 일본을 중심으로 주변 3국의 색채를 달리한다. 조선과 일본 사이 바다 한가운데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과 같은 색으로 칠해져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영 토임을 명확히 밝히는 유물이다. /수원 출신의 역사학자 사운 이종학 선생과 학창시절을 수원에서 보내 우리와 각별한 인연을 맺은 소강 민관식 선생의 기증유물을 전시해 보다 다양한 역사와 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 조주현기자■뜨거운 열정으로 채운 소중한 역사 역사문화에 관한 사료수집과 연구에 평생을 바친 수원 출신의 서지학자 사운(史芸) 이종학(1927~2002) 선생 유가족이 기증한 자료는 무척 다양하다. 일제 침략사 자료, 충무공 이순신과 독도 관련 자료, 고지도 등 2만여 점이나 된다. 잠시 의자에 앉아 이종학 선생이 일본도서관에서 극비 문서를 발견하고 이를 입수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상을 관람한다. 짧지만 감동적이다. 1920년대에 발행된 수원 화홍문을 담은 천연색 엽서에도 사연이 담겨 있다. 그는 엽서 소장자에게 “인천사람이 왜 수원 사진엽서를 가지고 있소? 수원 건 수원으로 돌려야지.” 이처럼 화홍문 엽서는 인천의 사진엽서 6장을 주고 교환한 것이다. 선생이 수집한 독도, 충무공 이순신, 간도, 동학혁명, 일제침략사, 화성(華城) 등에 관한 사료는 국내 최고의 것으로 평가를 받는다. “우리 박물관에는 7,000여 장의 엽서가 있는데, 일제강점기의 우리나라 풍경과 문화를 두루 살펴볼 수 있는 흥미로울 자료입니다. 엽서를 활용한 전시도 계획 중에 있습니다.” 소강실에는 소강(小崗) 민관식(1918∼2006) 선생의 기증유물 3만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국회의원 출신으로 문체부장관과 대한체육회장을 지냈던 민관식 선생은 스포츠와 올림픽에 관련된 다양한 유물을 수집한다. 소장품 중에서 몇 가지만 소개한다. ‘아시아의 물개’라는 별명을 가졌던 고 조오련 선수가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에서 딴 금메달이 있다. 오륜기가 새겨진 성화봉이 있다. 88서울올림픽 개막식에서 베르린올림픽에서 영광의 월계관을 쓴 고 손기정 옹이 임춘애 선수에게 넘겼던 최종 성화봉으로 까맣게 그을린 흔적이 뚜렷하다. 1991년 남북한 탁구단일팀을 구성해 최강 중국을 꺾고 세계를 재패한 선수들이 친필 사인한 탁구 라켓을 보면서 남북이 하나가 되어 펼친 감동의 역사가 재현되기를 기도한다. ■배움과 놀이, 성찰의 공간 수원광교박물관은 그동안 ‘나도 고고학자’, ‘독도에서 놀자’, ‘올림픽 스튜디오’, ‘어린이공방’ 등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프로그램을 꾸준히 운영하여 수원과 경기도를 대표하는 교육과 체험 및 놀이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2017년에는 울릉군 독도박물관과 ‘독도, 기록하고 기억하다’라는 주제로 공동특별전시회를 열었다. 유물과 기록을 통해 우리의 국토인 독도를 새롭게 기억하도록 도운 특별한 전시였다. 특별전시 ‘광교, 시간을 말하다’는 사진으로 신도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사라진 광교의 옛 모습을 살펴볼 수 있도록 기획하여 호평을 받았다. 때로는 한 장의 사진이 10권의 책보다 더 많은 사실을 전해준다. 박물관 옆에는 동네 어르신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선사했던 당산의 400년 된 느티나무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바로 곁에 있는 심온 선생의 사당과 묘소, 조광조 선생의 묘소와 심곡서원까지 답사하기를 추천한다. 광교역사공원을 산책하며 생동하는 봄의 기운을 느껴보는 것도 좋겠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2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 양평 ‘몽양기념관’

2022년의 대한민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분열과 갈등의 틈이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가 꼭 만나야 할 위대한 스승이 있다. 그분은 바로 몽양 여운형(1886~1947)이다. 몽양은 해방정국에서 외세에 의해 국토가 남북으로 분단되고 좌우로 갈라져 싸우는 민족의 장래를 염려하며 좌우통합과 분단극복을 온몸으로 실천하셨던 분이다. 몽양은 양평사람이다. 경의중앙선 신원역에서 가까운 곳에 여운형의 생가와 몽양기념관이 있다. ‘물소리길’이란 예쁜 이름의 언덕길 옆에 자리 잡은 ‘묘골애오와공원’을 둘러본다. 묘골은 몽양이 살던 동네 이름이며 애오와(愛吾窩)는 ‘나의 사랑하는 집’이란 뜻이다. 몽양 여운형 선생의 동상을 둘러싸고 있는 대리석에 선생의 행적이 새겨져 있다. 러시아혁명의 주역 레닌과 트로츠키, 중국의 혁명가 쑨원, 베트남 건국의 아버지 호치민, 선교사 언더우드의 얼굴도 만날 수 있다. 이들은 몽양이 조국 광복을 위해 투쟁하던 시절에 교류한 사람들이다. 물론 몽양은 일본의 정치가들과도 여러 차례 만났다. 이처럼 몽양은 조국 독립을 위한 일이라면 이념과 신분,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지금 익어도 새로운 몽양의 어록비를 살피며 느릿하게 걸었는데도 어느새 기념관이다. ■새로운 나라를 향한 몽양의 길 몽양기념관(관장 이철순) 벽면에 ‘맑은 행복 양평 2022.1.25. 몽양기념관 새롭게 개관하다’란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다. 이 관장께 몽양의 생애와 사상을 소개하는 이야기에 빠져들었다가 전시관을 둘러보기 위해 일어섰다. “개관 10주년을 맞아 시설을 개편하고 유물, 사진, 기록 등 새롭게 확보한 자료를 활용해 몽양의 패턴화와 이미지화를 시도했지요. 상설전시는 ‘평등과 애국계몽의 길’, ‘자유와 독립의 길’, ‘평화와 통일의 길’, ‘몽양 여운형의 길’이라는 4가지 주제로 여운형 선생이 지나온 길을 통해 선생이 보여준 정신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박경표 학예사의 설명을 들으며 전시관에 들어선다. 빛이 쏟아지는 유리 천장 아래로 하얀 천이 길게 드리워진 전시관 입구가 인상적이다. 만장으로 몽양의 일생과 사상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구성이다. 몽양의 독립과 자주정신을 관람객에게 오롯이 전달하려는 열망이 느껴지는 훌륭한 연출이다. 천에 새겨진 글귀가 한눈에 들어온다. ‘몽양 여운형 그는 누구인가? 몽양은 조선의 자주독립과 통일 정부 수립이라는 간절한 꿈을 실행하는 삶의 길을 걸었다.’ 옆에는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수인복을 입은 몽양의 얼굴과 ‘조선을 사랑한 독립운동가’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계몽을 실천한 기독교 선교사’라는 글귀에 눈길이 잠시 머문다. 아, 몽양이 신학을 공부하고 선교사로도 활동했구나! 몽양은 ‘여행을 사랑했던 모험가’이자 ‘청년과 문학을 사랑한 언론인’이었으며 ‘세계로 나아간 조선의 혁명가’였다. ‘일곱 남매의 아버지’였고 ‘사상을 뛰어넘는 사회민주주의자’였던 몽양 여운형 선생의 일대기를 한국사와 세계사의 굵직한 사건과 관련 사진을 동시에 제시하여 그 시대를 통으로 이해하도록 구성하고 있다. ■평등과 자주를 향한 지도자의 한평생 몽양(夢陽) 여운형은 1886년 경기도 양평군 신원면 묘골에서 태어났다. 몽양은 어린 시절 할아버지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그의 할아버지는 동학을 신봉하고 나라를 개혁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유배를 살았던 실천적 선비였다. 작은할아버지는 해월 최시형을 도와 <용담유사>를 편찬했던 분이다. “며느리를 사랑하라. 노예를 자식같이 사랑하라. 일체의 모든 사람을 한울로 인정하라. 손님이 오거든 한울님이 오셨다 하고 어린아이를 때리지 말라.” <용담유사>에 실린 내용처럼 몽양의 평등사상은 동학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1주제인 ‘평등과 애국계몽의 길’에서는 노비해방과 양평 고향 집에 설립한 광동학교 등 기독교 선교사 활동을 중심으로 한 계몽운동을 소개하고 있다. 기록으로만 전해지는 ‘광동학교’를 디오라마 모형을 통해 재현했다. 2주제인 ‘자유와 독립의 길’에서는 김규식을 파리에 파견하여 우리의 독립의 의지와 당위성을 전 세계에 알렸던 신한청년당 조직과 도쿄제국호텔연설 그리고 조선중앙일보 사장 시절의 활동을 살펴볼 수 있다. 조선중앙일보에 천재 시인 이상의 ‘오감도’를 연재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도쿄제국호텔에서의 연설을 육성으로 재현했으며, 세계를 무대로 한 외교활동을 멀티터치스크린을 통해 체험할 수 있다. 곳곳에서 어린 관람객을 위한 속 깊은 배려를 발견할 수 있다. 3주제인 ‘평화와 통일의 길’에서는 해방과 함께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조직한 조선건국동맹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그리고 좌우합작위원회를 통해 남북, 좌우로 분열된 나라를 통일하기 위해 헌신한 선생의 노력을 풍부한 자료를 통해 생생하게 보여준다. 선생이 신문과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몽양이 원했던 나라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지금의 우리는 어떤 나라에서 살고 있는지 그려 볼 수 있다. 4주제인 ‘몽양 여운형의 길’에서는 선생이 남긴 마지막 메시지를 통해 역사로 남은 과거의 인물이 아닌 현재 우리에게 나아갈 방향을 생각하고 비전을 제시하는 인물로 재조명하는 공간이다. 피격의 현장에서 입고 있었던 피 묻은 상의(혈의)와 2차 미소공동위원회와 관련한 내용이 적힌 수첩 같은 소장품들을 함께 전시하였다. 특히 장례식에서 여운형 선생을 보내며 사회 각층에서 만든 만장 다섯 장을 전시하여 그 의미를 더했다. 몽양 여운형 선생은 냉전 이데올로기로 인해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던 대표적인 분이다. 서거 58주기가 되는 2005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고 61주기가 되는 2008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던 사실은 이를 말해주는 것이다. 이 관장의 들려주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전시관을 둘러본 관람객들의 반응이 재미있습니다. 몽양을 빨갱이로 알았는데, 내가 알던 것과 많이 다르네. 몽양이 선교사를 지냈어?” “일장기말소사건도 몽양이 기획한 것이었네!” “이상의 ‘오감도’를 연재한 곳도 몽양이 사장으로 재직했던 조선중앙일보였네! 내가 여태 잘못 알고 있었구나!” ■평화를 이루는 몽양의 꿈 그렇다. 몽양기념관을 둘러보면 우리가 가진 지식이 얼마나 왜곡되고 편협한 것이지 금방 깨달을 것이다. 전시를 다 둘러보고 생가를 거닐면서 이 관장이 들려주는 소식이 반가웠다. “지금 몽양기념관의 부속시설인 ‘몽양 교육관’의 신축을 준비하고 있는데 오는 12월에 준공 예정입니다. 감사하게도 유족들이 땅을 기부하셨지요. 사실 꼭 필요한 것이 교육인데, 여태 교육관이 없었습니다. 마침 군수님이 도비 25억과 군비 16억 합 41억을 확보해서 교육관을 건설하도록 지원해주셨습니다. 장차 이곳을 ‘몽양 평화공원’으로 조성하여 청소년들에게 몽양의 정신을 전하고 싶습니다. 지난해 기념관의 대중화 원년 선포했지요. 올해는 이것을 좀 더 확장할 계획입니다. 몽양을 과거의 사람이 아니라 이 시대에 살아 움직이는 분으로 소개하는 것입니다.” 몽양의 위대한 정신은 오늘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가나안농군학교’를 세워 한국의 농촌을 변화시킨 김용기 장로는 몽양이 세우고 가르친 광동학교 출신이다. 기독교 교육단체인 크리스천 아카데미를 설립해 청년지도자를 육성하고 1970년대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강원룡 목사도 몽양의 정신을 계승한 인물이다. 봄이다. 물 맑은 양평에는 예술인들이 많이 사는 도시로 소문난 곳이다. 물론 미술관도 여럿이다. 특히 탁월한 기획력으로 전국 미술관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양평군립미술관이 멀지 않는 곳에 있다. 몽양기념관 이철순 관장이 양평미술관의 초대 관장을 지냈다는 사실을 알고 더욱 몽양기념관의 멋진 변화를 기대하게 된다. 몽양기념관과 (사)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양평군의 노력으로 몽양 여운형 선생의 정신이 봄물처럼 번져나가고 있다. 몽양 정신으로 화합하고 협력하여 상생하는 새로운 ‘삶의 문화’가 활짝 꽃피우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2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 안산 최용신기념관

그윽한 매화 향기가 지친 영혼을 위로하는 시절이다. 아름다운 사람이 남긴 향기는 매향보다 더 멀리 퍼진다. 안산시 상록구는 농촌계몽운동가 최용신의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자는 뜻에서 2002년 11월 1일에 붙여졌다. 안산시에는 소설 <상록수>의 모델인 최용신의 정신을 기리는 공간이 많다. 상록청소년수련관, 상록수체육관, 상록초등학교, 상록중학교처럼 최용신의 정신이 도시 곳곳에 스며 있다. 4호선 상록수역에서 ‘최용신기념관’까지 이어지는 길은 ‘최용신거리’이다. ‘최용신 이야기 속을 거닐다’란 표지처럼 거리에 세워진 조형물에도 최용신의 삶과 정신이 담겨 있다. 최용신이 아이들과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만남)을 비롯해 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이끎)과 아이들이 씩씩하게 걸어가는 모습(향함), 달려오는 아이를 향해 팔을 벌리고 있는 모습(안김)까지 최용신 이야기를 친절하게 들려준다. ‘만남’과 ‘이끎’과 ‘향함’과 ‘안김’이라는 쉽고 친숙한 표현으로 짐작하듯 아이들에 대한 배려가 물씬 느껴진다. ■손을 잡고 달려가자! 농촌으로, 여성과 아이들 곁으로 상록수공원에 자리 잡은 안산시 최용신기념관(관장 윤화섭)은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기념관 주변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산책하는 시민들의 표정이 여유롭다. 산책로를 따라 곳곳에 기념비가 서 있다. 최용신의 어록을 새긴 비와 <상록수>를 통해 최용신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린 심훈의 문학기념비, <최용신 양의 소전>을 지은 유달영 교수 등이 세운 ‘최용신양을 기리는 돌’을 지나 잠시 걸으면 최용신이 잠들어 있는 무덤이 나타난다. 최용신 무덤 곁에 약혼자였던 김학준 교수의 무덤도 있다. 최용신기념관은 1종 전문박물관이자 국가보훈처의 지원을 받는 현충시설이다. 조규택 학예연구사와 윤필상 학예연구원의 안내로 기념관을 둘러보고 두 분과 대화를 나누면서 최용신의 불꽃 같은 생애에 빠져든다. 1909년 8월 원산과 가까운 함경도 덕원에서 태어나 교육자 가정에서 자란 최용신은 기독교 사학인 원산 루씨여고에 입학한다. 루씨여고는 3·1 만세운동과 농촌계몽운동에 적극 참여한 민족학교였다. 최용신은 4년 동안 점심을 끊었다고 할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으나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였다. 전시실은 최용신의 학창시절부터 보여준다. 원산 루씨여학교에 재학할 때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비롯해 1911년에 펴낸 순 한글로 된 <구약전서>, <보통학교 조선어독본>, 갓을 쓴 인물 삽화가 들어 있는 <천로역정> 같은 희귀한 책도 볼 수 있다. “최용신의 손때가 묻은 일기라든가 졸업장 같은 1차 유물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관련 자료를 꾸준히 수집하여 최용신의 일대기를 그려볼 수 있도록 꾸몄습니다.” 관계자의 말처럼 아쉬움은 있지만 최용신의 생애를 전달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농촌운동에 뜻을 두었던 최용신의 사진과 발언이 실린 1928년 4월 1일 자 조선일보의 기사가 눈길을 끈다. “새봄 맞아 교문 나서는 재원들-원산루씨학교의 특출한 네 규수”라는 제목을 기사에서 최용신은 이렇게 주장한다. “농촌 여성의 향상은 중등교육을 받은 우리들의 책임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중등교육을 받고 나아가는 우리는 화려한 도시의 생활만 동경하고 안락한 처지만 꿈꾸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농촌으로 돌아가 문맹퇴치에 노력하려는가? 거듭 말하오니 우리는 농촌으로 달려가자! 손을 잡고 달려가자!” ■안산에 뿌린 최용신 정신 1929년 서울에 있는 감리교협성신학교로 진학한 최용신은 정인보, 정경옥 같은 교수들에게 역사와 사회학과 신학을 배웠다. 마침 교장 채핀 부인이 농촌 문제에 관심이 많아 학교에 여성 농촌지도자 양성을 위한 ‘농촌사업지도교육과’를 개설하는데 황애덕 교수에게 그 일을 맡겼다. 황애덕은 ‘2·8독립선언’에 참여하고 군자금을 송금하다가 체포되어 투옥되었던 독립지사로 최용신의 은사였다. 황애덕은 방학이 되면 학생을 둘씩 짝을 지워 농촌으로 파송해 계몽운동에 참여시켰다. 그해 여름방학에 최용신은 김노득과 함께 황해도 수안에서 석 달을 지내며 농촌봉사활동을 벌였다. 3·1운동 이후 청년들은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일제의 수탈에 신음하는 농촌에서 야학을 열고 아동과 부녀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환경을 개선하는 활동을 벌여나갔다. 1930년대 일본 제국주의의 식량 수탈로 농민들의 생활환경이 매우 어려워졌다. 이때 문맹퇴치 운동과 브나로드(Vnarod: '민중 속으로')운동이 벌어졌다. 이 운동에 기독교청년회와 사립학교와 3·1운동으로 창간된 조선·동아·조선중앙 세 신문사가 앞장섰다. 1931년 10월, 최용신은 YWCA 농촌지도원 자격으로 반월면 천곡에 첫발을 디딘다. 당시 사진을 통해 최용신이 샘골교회당을 빌려 아동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열었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최용신과 뜻을 같이했던 스승 황애덕, 어려울 때마다 도움을 준 신간회 수원지회 감사를 지낸 염석주, 강습소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최용신의 말을 듣고 1천 평의 땅을 기증한 박용덕 등의 얼굴도 확인할 수 있다. 1933년 1월 15일 샘골강습소 낙성식 기념사진 속에는 최용신과 도움을 준 이웃들과 교사들, 야무진 아이들의 표정에도 자신감과 자랑스러움이 묻어 있다. 이 강습소에서 최용신 선생에게 배운 제자 홍석필은 2004년 최용신기념관 건립을 위해 1억5천만원을 기부한다. ■한 알의 씨앗이 썩어 푸른 숲을 만들다 1934년 3월, 최용신은 학원 운영을 후임 교사에게 맡기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 고베여자신학교 사회사업학과에 진학했다. 유학 생활 중에 찍은 단체 사진 속에서 최용신의 얼굴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학업을 시작한 지 석 달 만에 각기병에 걸려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자 귀국길에 오른다. 요양을 위해 고향으로 향하려던 최용신은 발길을 샘골로 돌린다. 샘골 주민들이 누워 있기만 해도 좋으니 꼭 샘골로 돌아와 달라고 간청했던 까닭이다. 수원도립병원에서 두 번 수술하고 입원해 있을 때 샘골 사람들의 병문안이 줄을 이었다. 한겨울에 어린 학생들까지 50리 길을 걸어서 문병하며 선생님의 쾌유를 빌었다. 그러나 1935년 12월 23일 자정 ‘샘골, 샘골’을 되뇌던 최용신은 끝내 숨을 거두었다. 이때 몽양 여운형 선생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중앙일보에서 농촌운동에 헌신하다 요절한 최용신을 주목한다. 1935년 1월 27일 자 조선중앙일보는 ‘수원군하의 선각자 무산아동의 자모 최용신 양 별세’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내보낸다. 이어 ‘썩은 한 개의 밀알, 브나로드의 선각자 고 최용신양의 일생’이란 특집 기사를 3월 2일부터 4일까지 3회 연재하였다. 이 기사를 읽고 최용신의 생애에 감동한 심훈은 이를 소설로 다듬어 1935년 동아일보사의 ‘창간15주년기념 장편소설 특별공모’에 당선되었는데, 9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최용신의 유언장, 특집 기사, 3월에 거행된 천곡강습소 제2회 졸업식 기념사진은 최용신의 부재의 아픔을 말없이 들려주고 있다.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이 실존 인물 최용신을 모델로 했다는 사실을 밝힌 사람이 있다. 바로 김교신(1901~1945)과 유달영이다. 수원고농에 재학할 때 최용신을 후원했던 류달영이 스승 김교신의 도움을 받아 <최용신 소전>를 펴낸다. 이 책을 통해 <상록수>의 주인공 채영신은 실존 인물 최용신이라는 사실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두 책을 바탕으로 영화 <상록수>가 두 차례나 만들어졌다. 신상옥 감독과 임권택 감독이다. 60년 된 영화 ‘상록수’ 포스터를 통해 최용신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기념관 관계자와의 대화에서 최용신의 정신이 부활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안산은 한국의 대표적인 다문화 도시입니다. 약자를 향한 최용신 선생의 정신과 우리 안산시의 특성을 결합하는 일입니다. 시민교육을 통해 안산에 사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당당히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업이 선생의 뜻을 계승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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