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칼럼/6월의 노래 ①

‘모야 모야 노랑 모야/언제 커서 열매 맺나’ 모내기 꾼들이 이렇게 소리 모아 뽑아대고 나면 ‘우우 우 후…’하는 논두렁 양쪽 갓 줄잡이들 후렴 속에 못 줄이 한 뼘쯤 뒤로 옮겨지면 이내 또 ‘이달 커고 저달 커서/칠팔월 되면 열매 맺지’하고 소리가 이어진다. 논바닥에 모를 꽂는 모내기 꾼들의 손이 논 물을 재빠르게 드나들며 내는 철벙거린 소리가 거의 쉴 새 없다.

지금은 모내기를 이앙기로 드르륵 하지만 그 땐 그랬다. 거머리는 왜 또 그리도 많았던지, 새참 때면 종아리 여기 저기에 찰싹 달아붙은 거머리를 떼어 내는 게 일이었다. 손으로 잡아 댕겨서 안떨어지면 모래로 밀어대곤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논엔 거머리가 있어야 제격이다. 거머리가 살 수 있으므로 해서 논에서 미꾸라지도 나고 우렁이도 나고 메뚜기도 난다. 그 무렵은 농약이란 걸 칠 줄 몰랐기 때문에 시쳇말로 청정 농법이었다.

논산 훈련소에 입대했을 때에도 더운 6월이었다. 수통에 물이 떨어지면 행군 중에 쩔쩔 끓는 논물을 마셔 갈증을 달래곤 했다. 지금 같으면 논물을 마셨다간 농약 중독으로 아마 목숨 부지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요즘 모내기가 한창이다. 모내기를 마친 들판의 노랑 논을 보면서 쌀값이 헐값이어서 수지 타산이 맞니 안맞니 하면서도 논을 놀리지 않고 그래도 애써 모내기를 한 것이 대견스럽고 고마운 생각까지 든다. 농사는 남의 농사라도 역시 잘 되어야 인심이 후해진다. 모를 갓낸 6월의 논을 보는 회포는 해마다 그 때를 잊지 못한다. 잔인한 6월의 한국전쟁, 그것은 모내기를 다 마쳤을 무렵에 일어나서 벼 베기할 즈음에 9·28 수복이 있고도 그리고 3년이나 이어졌다.

1950년 6월 25일, 그 날도 온 나라가 모내기를 마친 논처럼 참으로 평화로웠다. 시골에선 바쁜 농사일 한 고비를 넘긴 안도감에서 모처럼 정자나무 그늘을 즐길만큼 사람들 마음이 푸근했고, 도시에선 일요일을 즐겨 서울 한강 같은데선 보트놀이 행락이 넘쳤다. 일선 장병은 대거 외박나온 가운데 육본 수뇌들은 전날 밤 늦도록 육군회관 낙성식 파티에서 진탕하게 놀아 주독에 빠졌다.

작취에서 헤어나지 못한 군 수뇌부는 이날 새벽 4시를 기해 38선 전역에서 노도처럼 밀고오는 북측 인민군대의 전면전 도발을 종종 있었던 우발적 국지전으로 지레 짐작하여 보고받는 것조차 귀찮아 했다. 정치권에서는 며칠 전까지 경찰에 검거된 남로당 거물 김삼룡과 이주하를 평양 고려호텔에 연금된 민족진영 거두 조만식과 교환하자고 협상을 제의해온 저들이 설마 남침했겠느냐며 반신반의 했다.

대통령 이승만은 ‘용맹무쌍한 국군이 반격에 나서 적을 격퇴시키고 있다’는 국방장관 신성모의 허위보고에 놀아나 ‘서울 시민은 안심하라’는 라디오 방송을 되풀이 했다. 그야말로 개판같은 잠꼬대 속에 수도 서울을 불과 사흘만에 내주고 말았다. 53년이 흘렀다. 전쟁 재발을 걱정하면 북측은 전쟁할 생각도 안하는데, 괜히 이쪽에서 먼저 야단들이라면서 선각자연하는 잘못된 지식인들이 행세하고 있다,

오늘의 이런 정황이 과연 1950년의 정황과 얼마나 다른 가를 생각해 보면 실로 모골이 송연해진다. 한국전쟁의 시산혈하를 경험하지 못한 일부의 세대들이 마치 전쟁을 무슨 게임처럼 여기는 그릇된 인식도 두렵다. 비록 모내기 소리는 사라지고 거머리 같은 건 없어졌지만 노랑 모를 낸 논은 역시 예쁘고 평화롭긴 마찬가지다. 이런데도 잔인했던 그 6월의 전율을 갖는 것은 그 모내기꾼들이 불과 얼마 뒤에 꿈도 못꾸었던 전쟁터에 나가 삼대처럼 쓰러진 그같은 동족상잔의 참극이 다시 있어서는 안된다는 염원 때문이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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