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칼럼/6월의 노래 ②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 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 지라도/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포크송의 양희은 노래 ‘아침이슬’이다. 지금도 이 노래를 들을 때면 피가 뛴다. 민주화 6월 민중항쟁, 인파의 격랑 속에 퍼부은 최루탄이 서울시청 광장과 프레스센터 주변 태평로를 진동할 때, 매연으로 후두염을 앓아가면서 이리 저리 뛰어 취재했 던 게 생각난다. 또 하나의 6월, 한국전쟁 발발 땐 중학생으로 학도병을 지원하는 선배들 틈에서 ‘학도가’를 부르다가, 인공치하 3개월 동안 ‘김일성장군의 노래’ ‘빨치산 노래’ 등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배워야 했다.

2003년의 6월 지금은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할까, 새 순 없인 뿌리가 있을 수 없고 뿌리 없인 새 순이 날 수가 없다. 1948년 같은 해에 수립된 대한민국은 자유주의 정권,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공산주의 정권으로 오늘에 이른다. 북에선 북조선인민회의 제3차회의가 구성한 인민회의특별회의에서 1948년2월6일 헌법 초안을 만들어 인공을 수립했던 게 그해 9월9일이다.

남에서는 같은 해 5월10일 제헌국회 구성을 위한 총선거를 치르면서 이를 방해한 공산세력들에 의해 무수한 인명이 희생됐다. 남로당 사람들이 투표소를 습격, 죽창으로 선거관리 사무원과 유권자를 닥치는대로 찔러 죽이는 것을 어릴 적에 목격한 내가 살았던 곳 말고도 남쪽 전역에서 이런 참사가 여기 저기서 숱하게 있었다.

해방 후 우익 진영의 반탁과 좌익 진영의 찬탁을 둘러싼 이념 투쟁으로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처럼 죽어간 희생을 치르고도 1948년8월15일 정부 수립을 위한 5·10총선 당시만 해도 실로 수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리고도 모자라 1950년엔 1천만 이산가족과 300만명의 사상자를 낸 6·25가 터져 3년여동안 국토가 불바다로 폐허화 했다.

이같은 수난과 폐허를 딛고 그래도 오늘만큼 일어선 대한민국의 뿌리는 자유민주주의다. 이런데도 자유민주주의 새 순이 돋아나야 할 대한민국 뿌리에 엉뚱한 인공 뿌리를 접 붙여 공산주의 순을 돋게 하려는 무리들이 있어 보인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엔 무엇이든 끝없이 관대하면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사사건건 트집잡는 이런 무리들은 기실 대한민국 덕분에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다. 막상 그들보다 못 먹고 못 산 민중은 태극기를 보면 충성심을 갖는데 비해 앞서가는 지식인으로 위장한 그 무리들은 태극기에 절하는 것조차 촌스럽다고 말한다.

남북이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것은 무서운 전쟁 재발을 막자는 것이지 공산주의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남로당 반란군을 ‘남부군’이라 해도 보아주는 것은 서로의 시대적 희생을 아프게 여겨 그런 것이지 인공 정권을 지지해서가 아니다. 이 틈을 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망가뜨리려는 그들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자본주의 모순은 자유민주주의의 가장 큰 약점이고 모순의 극복은 가장 큰 강점이다. 대한민국 뿌리에 접 붙이려는 이단의 순은 결코 탄소동화작용을 일으킬 수가 없다. 그 뿌리엔 정체성 지닌 그 새 순이 진정한 이 시대의 새로운 지식인이다. 내년 6월 쯤엔 중도우익 민중의 새로운 저항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된다. 만일 그렇게 되는 불행한 사태가 생기면 ‘아침이슬’의 노래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설 것만 같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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