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칼럼/‘박사 樂士’와 파업

그는 밤 무대의 악사다. 오르가니스트다. 전자오르간이나 연주하면 그만이라 할지 모르지만 보통 악사가 아니다. 박사다. 그것도 노동운동이 전공분야에 속하는 그런 박사다. ‘박사악사’의 눈엔 그들의 외침이 공허하게만 들렸다. 무슨 연금 승계 등을 요구하며 가지각색의 깃발에 적힌 갖가지 구호, 목이 터져라 하고 핏대를 돋우는 모습들이 도시 이상하게만 보였다. 법 절차도 없고 명분도 없이 제멋대로 사회공익을 유린하는 이기적 패거리 작당으로 밖에 보이지 않은 것이다.

그의 발걸음은 그날 따라 더 무거웠다. 아내를 대할 면목이 없기 때문이다. 피땀 어린 내조로 명문 대학에서 학문 최고의 학위를 따고도 사회적 정착을 못하는 방황이 아내에게 부끄럽기도 했다. 시간강사다. 그런 자신을 보따리 장사꾼이라고 자조하기도 한다. K대학, S여대, P대학, D대학 등 네군데에 강의를 나간다. 그래봐야 모두 합쳐 200만원을 받는다. 그중 세군데는 지방 캠퍼스다.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며 충당하는 승용차 휘발유 값을 제하고 나면 별로 남는 것도 없다. ‘교수초빙’ 광고를 보고 원서도 내보았다. 아니다. 채용 기준은 학문적 실력이나 소양이 아니고 돈이었다. 그것도 최저가격 1억원을 시작으로 하여 입찰을 붙이는 것이었다. ‘초빙’이 아닌 ‘교수직 경매입찰’을 포기하곤 했다.

자치단체 같은데서 특정직을 공모하는 걸 보고 응모도 해보았다. 역시 아니다. 발령자를 미리 내정해둔 허울 뿐인 공모는 ‘짜고 치는 고스톱판’이었다. 그의 알찬 이력의 적성, 발군의 실력, 이런 객관적 잣대도 정실 채용 앞에서는 무력하였다. 그래서 부업 아닌 부업으로 시작한 것이 밤 무대의 악사다. 학생시절 부터 악기엔 소질이 있었던 게 큰 도움이 됐다. 음악학원에서 어렵지 않게 솜씨를 익힐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전자오르가니스트로 밤이면 예술가 타입의 가발을 쓰고 무대에 섰다.

그건 우연이었다. ‘박사’의 ‘악사’데뷔는 우연이었으나 알고 보면 그만이 아니다. 부업을 귀띔해준 것은 역시 같은 시간강사였다. 그를 딱하게 보다 못한 동료가 자기도 악사 부업을 한다면서 일깨워 주어 막상 시작하고 보니 ‘시간강사 악사’가 한 둘이 아니더라는 것이다. 다만 서로간에 체면이 있고 해서 굳이 밝히지 않을 뿐인 것이다. 그러나 이마저 어렵게 됐다. 불경기의 장기화로 미사리 카페촌 같은데도 찬바람이 불어 문 닫는 업소가 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부업 업소 역시 휴업하게 되어 악사 자리마저 실직한 그의 귀가길 걸음이 무거워 진 것이다.

악사 소득이 네군데 대학의 시간강사 강의료보다 많았던 터라 여간 큰 타격이 아닌 것이다. 물론 아내에겐 처음 음악학원에 다닐적 부터 철저한 비밀이었다. 박사 학위까지 따게 해놓으니까 부업이든 무엇이든 간에 기껏 밤무대 악사냐 하는 실망을 아내에게 차마 끼쳐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름방학엔 시간강사 강의가 없으므로 쥐꼬리 만한 강의료도 그나마 없게된다. 시간강사가 주업일 수 있을는 지는 모르지만 어떻든 주업·부업을 다 잃은 ‘박사악사’의 시간강사 마음은 착잡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차라리 길거리에서 노운동이랍시고 되지도 않은 말로 악다구니를 벌이는 그 사람들의 직장, 그 자리가 정말 부러웠다면서 소주 잔을 단 숨에 들이켰다. 희극인가? 웃겨도 너무 웃긴다. 비극인가? 비참해도 너무 잔인하다. 도대체가 열심히 살려고 해도 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그런 한쪽에서는 자기네 직장을 엽기적으로 헐뜯고 매도한다. 세상을 좀 더 바로 세워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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