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칼럼/헌법을 생각해 본다

제헌절을 맞으면 생각나는 추억이 있다. 고등학생 때다. 헌법 전 조문을 다 외웠다. 그냥 헌법이 좋아서 시작해본 게 암기하게 됐다. 그 무렵은 중소도시에는 시내버스가 없어 걷는 경우가 많았다. 길 가면서도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으로 시작되는 전문(前文)부터 마지막 조문까지 외우면서 걷노라면 지루한 줄을 몰랐다. 미처 다 외우지 못하고 목적지에 닿거나 거듭 반복해야 할 때도 있었다. 어떤 수치를 떠올려 해당되는 조문을 틈새로 외워보기도 했다.

특히 매료됐던 조항은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는 경제질서의 기본 항목이었다. 웃기는 것은 다니다 그만 둔 대학생이 되고는 이 항목에 강한 의문과 반발심에서 한동안 모순의 갈등을 겪었던 일이다. 어떻든 헌법 조문의 구절구절이 다 주옥같은 명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내가 외운 헌법은 1차개헌(발췌개헌) 헌법이다. 그로부터 50년을 뛰어넘는 지금, 지금도 헌법을 (외우는 게 아니고) 읽어볼 때가 더러 있다.

그동안 아홉차례에 걸친 개헌이 있었다. 자유당 정권에선 대통령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위해 사사오입이란 희한한 개헌이 있었다. 대통령 선거를 간선으로 하는 정략적 개헌도 두번이나 있었다. 내각책임제도 해봤고 양원제 국회를 두기도 했다. 또 헌법이 중단되는 사태를 헌정 55년동안에 무려 세번이나 겪었다.

1961년 육군 소장 박정희가 주도한 5·16군사 쿠데타, 그리고 이어 1972년 제4공화국으로 가는 유신선포로 국회가 초법적으로 강제 해산되는 등 두번째 헌정중단이 있었다. 그 해 10월27일 오후 유신선포와 비상계엄을 결의한 비상국무회의가 있었던 날은 국회 국정감사가 한창이었다. 이튿날 문교위의 경북도교육위원회(당시는 지금의 도교육청을 그렇게 불렀다) 감사가 예정됐었다. 그래서 경북도교위가 그날 낮 기자들에게 오찬과 함께 상당액으로 추정되는 촌지를 내놨다. 그 때 경북도교위는 큰 비리가 있었으므로 국감을 계기삼아 단단히 문제화할 속셈으로, 밥은 얻어 먹었지만 촌지는 퇴짜를 놓았던 게 불과 몇시간 뒤 뜻밖에 국회가 해산됐다는 청천벽력의 TV속보가 나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촌지나 챙겨둘 걸 그랬다”는 동료들과의 농중진담을 해가며 포장마차에서 시국에 대한 푸념인지 울분인지를 소주잔에 토했던 게 생각난다.

세번째 헌정 중단은 1979년 대통령 박정희가 10·26 사건으로 타계한 이듬 해 5월31일 두 육군 소장 전두환, 노태우가 주축이 되어 역시 법에 없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란 것을 만들면서 비운을 맞은 국회 해산이다.

대통령 직선제 등을 골자로 한 현행 6공화국 헌법은 태평로를 연일 최루탄으로 물들인 6월항쟁 끝에 쟁취한 것으로 1987년 10월29일 개정이 확정됐다. 개헌한지 16년이 된다. 헌정사상 헌법을 고치지 않고 놔둔 기간으로는 가장 길다. 그래서인지 정치권의 개헌론이 간헐적으로 고개를 든다. 대통령의 5년제 단임을 없애고 4년 임기의 중임으로 고쳐야 한다는 게 요지다. 중임이 독재화를 가져온 폐단에 경을 쳐 도입한 것이 단임이다. 하지만 5년 단임이나 4년 중임이나 다 장·단점은 있다. 문제 해결의 열쇠는 제도도 중요하지만 운용에 있다. 영국처럼 불문율 헌법으로도 나라를 잘 다스리는 전통적 묘(妙)까지는 기대할 수 없어도 헌법정신을 최대한 살리고자 하는 노력이 있으면 그것이 바로 운용의 묘다.

현행 헌법은 수차 뜯어 고쳤다하여 흔히 ‘누더기 헌법’이라고들 하지만 그래도 괜찮은 헌법이다. 제헌절인 오늘, 대통령·총리 및 장관·국회의원들은 헌법을 한번쯤 정독해 봤으면 좋겠다.

/임양은주필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