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부·연탄배달·막노동 안해본일 없어… “시련이 나를 다시 세웠죠”
외식업 프렌차이즈 업계에서 ‘미다스의 손으로 잘 알려진 김영복 대표(46). 그는 현재의 모습과는 달리 힘든 역경을 딛고 재기에 성공한 CEO이다. 맨손으로 자수성가해 한때 잘 나가는 농산물 직배사업과 직판사업으로 큰 돈을 벌었다. 그런 그가 부도를 맞은 후 공사판을 전전하다 다시 재기, 성공신화를 쓰고 있다.
충남 청양이 고향인 그는 경력부터가 남다르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친구들이 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 고향에서 10년동안이나 지게를 지며 농사만 지었다.
1983년 24살에서야 겨우 중학교 공부를 시작하기 위해 수원에 올라왔지만, 그는 평범한 만학도에 불과했다. 농사 이외에는 별다른 기술이 없어 광부며 우체부, 연탄배달 등 안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닥치는대로 일했고, 저녁에는 공부에만 전념했다. 고생끝에 2년만에 고교 과정까지 검정고시로 합격했고, 26살 되던해에는 그토록 바라던 대학(충북대 농업경제학과)까지 입학했다.
그러나 대학에 입학했다고 고생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입학 이후 4년간 우유배달이며 막노동 등 갖가지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학비를 벌어야 했고, 그렇다고 취업도 생각처럼 쉽지만 않았다.
그는 취업을 앞둔 4학년이 돼서야 서른을 앞둔 나이가 취업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때문에 일찌감치 창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우유배달을 하며 모은 100만원을 가지고 수원으로 다시 올라와 지대미사업에 손을 댔다. 그야말로 무모한 모험을 시작한 것이다.
사업이라고는 하지만 동서의 도움을 받은 4평 남짓한 점포에 60만원을 주고 구입한 중고 오토바이, 저울, 석발기, 비닐 접착기, 그리고 외상으로 들여온 쌀 10가마가 전부였다.
농사를 지어본 경험을 삼아 그 당시 생소했던 포장쌀을 선보이고, 농민들과 직거래를 통해 수익률도 높였다. 뜻밖에 대박이었다. 장사에 소질이 있었던지 하루에 20㎏ 200포대를 팔아치우는 등 물건은 갖다 놓기가 무섭게 팔렸다. 88년 사업 시작 3년만에 무려 2억원이라는 거금을 손에 거머쥐었다.
내친 김에 92년 1억5천만원으로 농민들과 함께 ㈜농민회 농축산유통사업단을 설립하고 농축산물 집배사업과 직판사업에 뛰어들었다. 이후 승승장구하며 수원에만 5개의 직영점과 10개의 대리점, 40여명의 직원을 둘 정도로 사업체는 성장했다. 시쳇말로 잘나가는 사업가로 성공한 것이다. 당시에는 돈을 긁어 모은다고 할 정도로 주변 사람들의 부러움과 선망의 대상이었다.
화려한 시절도 잠시, 당시 직판이라는 개념도 생소했을뿐더러 작업이 표준화되지 않았고 농산물 유통과 관련된 전문성도 없이 혈기 하나만 믿고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했던 것이 화근이 됐다.
그동안 벌어놨던 돈은 사업확장에 모두 쏟아부어 가진돈은 바닥났고, 그나마 조금 남은 돈은 기일에 맞춰 빌린돈을 상환했다. 사업은 망해도 신의를 잃지 않겠다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그는 한순간에 낭떠러지 몰락의 길로 떨어졌다. 자금 부족의 악순환이 이어지면서 정육매장을 농민들이 직접 관리하도록 양도했지만, 집배사업은 94년 7억원이라는 결손액을 내고 문을 닫았다. 그 여파로 장사가 잘 되던 직영점 전부와 곡물 백화점도 정리해야 했다.
결국 96년 10억원의 부도를 맞아 회사를 정리하고 빚더미에 앉아야 했다. 애들은 할머니한테 보내고 부인과 함께 후배집에서 더부살이를 시작하게 됐다.
다시 무일푼이 된 그는 마땅한 직업을 갖지못해 아파트 공사장을 전전하며, 막노동으로 생계를 근근이 이어가면서 재기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그렇게 1년을 보냈을까. 자신이 부도를 낸 농산물센터를 인수한 후배가 그의 형편을 딱하게 여겨 센터 앞에서 장사를 해보라고 건의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지난 날의 부와 명예도, 그리고 체면도 다 버렸다. 그러나 재기의 꿈만은 놓지 않았던 그였다. 그는 도전했다. 재기를 위해 열심히 과일을 팔았다. 다른 사람들의 비아냥도 겸허히 받아들였다.
이런 노력을 하늘도 알았을까. 장사를 시작한지 5개월이 되기도 전에 채권자 중 한명이 그에게 수원 영통에 분양받은 점포를 맡겼다.
다시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는 외식업에 눈을 돌렸다. 변화무쌍한 외식업 시장에서 ‘계속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그는 골몰했다. 치킨 바비큐 전문점으로 업종을 정하고, 몇개월간 준비를 통해 가게를 열었다. 가게에는 손님의 발길이 끊이질 않을 정도로 반응이 금세 나타났다. 자신감을 얻자 내친김에 화성 봉담에 족발 공장을 설립하고 족발에까지 사업을 넓혔다.
2000년에는 동생과 함께 ‘두리아 체인사업본부’를 냈다. 자체 개발한 소스와 독특한 바비큐 조리법 등으로 사업은 성공을 거듭했다. 2002년 120개 점포에서 현재 전국적으로 260개 체인점으로 확대됐다.
큰 시련을 딛고 보란듯이 재기에 성공한 그는 다시 희망을 쏘아 올리는 듯했다. 그런 그가 또 일을 냈다. 2년전 잘 나가던 두리아 체인사업을 돌연 동생에게 물려주고는 제대로 된 외식업을 하겠다며 6개월전에 인계동에 ‘올 돈’이라는 삼겹살 전문점을 냈다.
지금은 한달에 1억2천만~1억3천만원의 안정적인 수익을 내고 있다. 그새 수원 본점을 제외하고 부산과 오산까지 체인점을 확대했다. 지금 그는 ‘올 돈’이 든든한 프랜차이즈 브랜드로 남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그는 ‘올 돈’을 단순히 먹기 좋고, 분위기 괜찮은 곳으로만 만들고 싶어하진 않는다. 누구나 좋아하는 외식 메뉴인 삼겹살을 보다 손쉽고, 맛있게 굽는 방법도 연구하면서 맛과 서비스까지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얼마전에는 삼겹살 조리기도 직접 만들고, 매장에 나와 직접 앞치마도 두르며 손님을 반갑게 맞는다.
이제 김 대표는 새로운 성공신화를 써 내려가고 있다. 한번에 두가지 일을 하는 성격이 못된다는 그는 시간이 좀더 걸리더라도 자기만의 길을 천천히 걸어갈 것이라며 “지켜봐주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영달기자 dalsarang@kgib.co.kr
/사진=조남진기자 njcho@kgib.co.kr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