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성 한보섬유 대표

“섬유산업, 사양길 아니에요” 한올 한올에 꿈을 심는다

“한 우물만 열심히 파면 언젠가는 우물안에 물이 가득차겠지요.” 크지는 않지만 한 회사만을 꾸준히 키워온 박용성 한보섬유 대표(49). 그리 크지 않은 키에 서글서글한 인상, 항상 남들 앞에서 당당한 모습의 박 대표. 그가 남들이 사양산업이라고 하는 섬유 회사를 이끌어온지도 벌써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늘 욕심없이 한 평생을 살아왔기에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 큰 후회는 없다고 회고했다. 박 대표의 지난 삶을 되내이다보면 그가 어느 정도의 노력파인지를 알게 된다.

85년 서울의 한 조그마한 공장에 편직기 10여대를 들여와 시작한 사업이 이제는 여엿한 한 기업의 대표로 성장하기까지 그에게는 우여곡절도 많았다.

돈을 벌기 위해 70년대초 고향인 충남 당진을 떠나 서울로 상경했다. 당시 서울의 작은 섬유 염색업체에 취업하면서 박 대표는 처음 섬유와 인연을 맺었다. 그는 이 회사에서 관리와 영업만 10여년을 맡아 일했다.

평범한 직장생활을 해오던 그에게도 주변 사람들은 직접 섬유업체를 운영해 볼 것을 권유했다. 당시 대기업은 물론이고 잘나가는 중소기업 가운데도 섬유에 손을 안댄 업체가 없을 정도로 섬유업은 호황이었다고 한다. 박 대표는 주저없이 85년에 창업을 선언했다.

그러나 세상일은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열정만 앞선 탓에 사업체를 세우기는 했지만 염색업체에서만 일해오던 박 대표에게는 편직은 너무나 생소한 것이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전문지식이 없어 무척이나 고전했다. 현장에서 직접 발로 뛰며 직원들과 함께 공장에서 밤새기를 밥먹듯했다. 조금씩 길이 보였다.

“당시에는 섬유가 엄청 잘나갈 때였죠. 주문도 많고 기계를 밤낮없이 돌리는 업체는 대부분 섬유업체였을 정도니까요.”

지금도 그렇지만 그는 품질을 최우선으로 한다. 때문에 투자에 항상 과감하다. 90년에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독일에서 편직기를 들어와 회사를 자동화했고, 93년에는 스위스에서 기계를 도입, 항상 남보다 한발 앞선 과감한 투자로 이목을 받았다.

나이 40을 앞두고 그는 뭔가 꿈을 이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사업이 한창 성장하던터라 욕심도 생겼다.

물량을 늘리고 제품도 고급화하기 위해 97년 일본에서 고가의 편직기를 들여올 생각이었다. 그는 은행에서 50만 달러 대출을 받고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했다. 그때까지만해도 실패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했던 IMF가 들이닥치면서 그는 고난의 길을 걷게 된다. 자고 일어나면 하루 아침에 이자가 올랐고 빚은 순식간에 100만 달러로 늘었다. 그는 충격과 스트레스로 병원에 두번씩이나 입원했다.

기계를 넘겨버리고 회사 문을 닫을까도 생각했지만 그는 다시 일어섰다.

‘한우물을 파라’는 그의 생활신조에서 알 수 있듯이 박 대표는 이 일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왔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다시 제품을 짜고 생산해내는 것이었다.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고 13년동안 먹고 살았던 일을 한순간에 놓을수가 없었어요. 그렇다고 뾰족히 할 줄 아는 일도 없었고요.”

이런 고난의 시절을 보내고 박 대표는 한발한발 다시 전진했다. 당시 대출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그는 아직도 품질만큼은 최우선으로 꼽는다. 그점이 바로 박 대표가 빨리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다.

얼마전까지만해도 박 대표는 중국과 베트남 등에서 물밀듯이 밀려오는 수입산 때문에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결국 그가 선택한 길은 차별화였다. 성남섬유제조사업협동조합과 함께 디자인을 고급화하고 공동브랜드를 활성화하는데 주력했다.

그동안의 노하우와 기술력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는 우선 시장성을 알아보기 위해 지난달 조합과 중국 동북 3성의 경제중심도시인 요녕성 심양시에서 열린 한국상품전시회에도 참가했다. 여기에서 자신이 만든 제품 홍보는 물론 효과적인 현지 마케팅까지 병행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뜻밖에 대박(?)을 터트렸다. 현장을 방문한 고객들을 대상으로 만족도 설문조사에서 중국 소비자 선정 우수 10대 한국 건강브랜드로 선정되는 등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중국 현지 마케팅을 준비하고 있는 조합은 물론이고 박 대표에게도 가능성을 활짝 열어준 쾌거였다. 또 전시 기간 내에 다양한 바이어들과의 상담도 이어졌고, 대리점을 개설하겠다는 제의도 받았다. 기대 이상의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지금도 자신이 걸어온 길에 후회는 없다고 한다. 앞으로 생을 다하는 그날까지 이일을 손에서 놓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이 일을 천직으로 알고 사는 박 대표에게 얼마전 또하나의 행복이 찾아왔다. 하나뿐인 아들이 아버지의 가업을 잇겠다며 공장 허드렛일도 마다않고 바닥부터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아들이 여간 고맙고 기특해 보이는게 아니었다고 한다.

언젠가부터 아들은 자신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자식이 아버지를 이해하고 함께 같은 직장에서 땀 흘리고 일하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선물인줄 모른다고 박 대표는 말한다.

그에게는 아직 꿈이 있다. 다른 회사의 주문을 받아 원단만 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브랜드를 만들어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에게 입혀보는 것이다. 이제 그 일을 아들과 함께 이루기를 그는 마음속으로 바라고 있다.

“20년 넘게 이 일을 해오면서 슬픈일도 기쁜 일도 많았습니다. 옆에서 항상 함께 해준 가족이 있어 행복했고, 공장에서 함께 땀흘려준 직원들이 있어 즐거웠습니다. 그동안 못다 이룬 꿈을 아들과 함께 만들어 나갈 겁니다.”

/조영달기자 dalsarang@kgib.co.kr

/사진=전형민기자 hmjeon@kg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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