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나타1악장'

임 양 은 주필
기자페이지

빈소를 차리고 화장을 하는 장례예식장은 더러 납골당을 두기도 한다. 그런데 장례예식장을 두고자 하는 곳마다 말썽이다. 어디라고 할 것 없이 장례예식장을 만들려는 자치단체장은 으레 역적 취급을 당한다.

서울 홍제파출소 뒤편에 화장터가 있었다. 벽제장례예식장으로 옮겨가기 전의 일이다. 홍제파출소 앞에서 시내버스를 내려 집을 가려면 화장터 옆길을 거쳐야 하는데 이게 고역이다. 안 그래도 기분이 언짢은 터에 날씨가 우중충하면 경유를 땐 굴뚝에서 나온 검정 그을음이 흩날리면서 누린 냄새가 풍긴다. 내가 한 때 장례예식장을 싫어했던 것은 젊었을 적에 겪은 이런 좋지못한 기억 때문이다. 심지어 문상을 다녀오면 목욕하고 입성도 벗어 빨도록 했다.

‘사람은 살면서 변한다’는 말을 실감한 것은 가족의 장례를 치르면서다. 부모와 아내를 보내고난 뒤, 그리고 이젠 내 차례라는 생각이 들면서는 장례예식장에 갖는 관념이 달라졌다. 이래서 장례예식장 건립을 두고 ‘결사 반대한다’는 사람들을 보면 내가 일찍이 지녔던 혐오적 관념을 떠올리곤 한다.

죽은 이의 혼령에 갖는 인식은 신앙의 자유다. 분명한 건 혼령이 입었던 육신은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땅속에 묻혀 썩는 물리적 변화든, 불에 타 가루만 남는 화학적 변화이든 간에 어차피 몸은 자연으로 간다.

이런 가운데 화장이 선호되는 경향이 두드러지는 것은 이렇게 보인다. 우선 매장은 돈 드는 부담이 크다. 국토의 묘지화를 걱정하는 견해가 있다. ‘명당자린 99.9%가 없다’는 지관들이 있다. 무엇보다 묘에 대한 관심이다. 나도 대구에 있는 선친의 묘소를 1년에 한 번 성묘가는 것도 벼르고 벼른 끝에 겨우 간다. 하물며 내 자식인들 애비보다 더 나을 게 없다는 생각으로 미리 포기한지가 오래다. 사족을 붙이자면 사후 시신을 가톨릭의대에 이미 기증해 놨다.

지금의 장례예식장도 화장장이다. 화장장이긴 해도 예전의 홍제화장터 같진 않다. 수년 전 수원 하동 두메에 있는 수원시연화장을 가보고 놀랐다. 20년 전 이던가, 권선동에 있었던 굴뚝화장장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장례예식장의 시설 현대화는 날이 갈수록 첨단으로 치닫는다. 시설만이 아니다. 주변 환경의 공원화도 여러가지로 연구되어 얼핏 보면 장례예식장 같지 않은데가 있다.

아무리 장례예식장을 첨단화하고 공원화해도 기분 좋은 곳이 아닌 건 맞다. 인간의 이런 보편적 정서는 죽음에 대한 거부 욕구다. 사람은 누구나 죽고싶지 않은 것이 본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음은 태어나면서 전제된 인간의 숙명이다. 누구의 죽음이든 간에 한 사람의 생애에 종지부를 찍는 것은 숙연하게 보아야 하는 의미가 이에 있다. 죽으면 거의 거쳐가야 하는 장례예식장을 모독하는 것은 인간의 죽음을 모독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장례예식장이 썩 내키는 곳은 아닐지라도 혐오시설로 매도하는 건 좀 심하다. 육신의 종착지가 혐오시설이라면 인간의 가치를 너무 없어보이게 하는 혹평이다. “도시의 이미지를 떨어뜨린다”고 한다. “집값이 떨어진다”고 한다. “자녀 교육에 좋지 않다”고도 한다. 정말 이런데에 장례예식장을 짓는 자치단체장이 있으면 그는 여론의 뭇매를 맞아야 한다. 그러나 반대일 수도 있다. 그렇지 않는데에 장례예식장을 짓는데도 혐오시설로 우기면 반대를 위한 트집쟁이 꾼인 것이다.

장례예식장은 지을만한 곳에 더 지어야 한다. 인간 생활의 필수 요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죽음엔 노소가 없다. 나이는 다만 확률일 뿐이다. 그 누구도 죽음 앞에서 오만이 허용될 수 없다. 장례예식장에 갖는 거부감이 오만일 것 같으면 그는 참으로 멋모른 가여운 인생이다. 생각의 여유는 마음의 문을 닫느냐, 여느냐에 달렸다.

악성 쇼팽의 장송곡은 애도의 장중함이 인간의 죽음에 숙연성을 갖게 해주지만, 원래 장송곡으로 작곡한 것은 아니다. 지병인 폐결핵 요양을 위해 여류시인이며 애인인 상드와 함께 마조르카섬에서 지내면서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 1악장의 한 부분이다. 이를 작곡하고 요절한 그의 곡을 ‘피아노의 시인’으로 불렸던 짧은 생애를 기려 후세 사람들이 장송곡으로 삼은 것이다. 쇼팽의 천재성은 어쩜 죽음을 계시받고 이 곡을 작곡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인간의 죽음이 뜻하는 숙연성은 쇼팽의 장송곡 이상으로 장중하다.

조간 신문에서 아침부터 죽음을 자꾸 얘기했다 하여 탓할 것 까지는 없다. 죽음은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숙제다. 살아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인간은 행복하다. 그 어떤 어려운 처지에 있을지라도 삶을 누리는 건 최대의 행복이다. 우린 모두 행복한 사람들인 것이다.

임 양 은 주필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