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여, 기를 펴라!

# 그것은 충격이었다. 알토란 같았다. 단아하기도 했지만 푸성귀처럼 싱싱해 보였다. 며칠 전이다. 갓 입사한 수습기자 다섯명이 이러했다. 젊음의 기풍이 샘솟 듯이 가득했다.

집에 가서 사진첩을 펼쳤다. 거기엔 역시 또 하나의 푸성귀 같은 젊은이가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자화상이다. 신문사에 갓 입사하고 찍은 사진이다. 스물아홉살 때다. 내가 시험을 잘 치러 신문기자가 된 게 아니다. 다른 사람이 시험을 못치러 내가 된 것이다. 이렇게 시작한 신문기자가 평생을 몸 담은 천직이 됐다.

이젠 노인이 됐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건 있다. 그것은 한결같은 신념이다. 정의다. 그리고 정의의 실체는 인간애라고 믿어왔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그 어느 분야든 신문이 추구하는 것은 인간애로 집약된다. 인간애는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 어떤 고관현직도 신문기자에겐 취재의 대상일 뿐이다. 취재엔 예절이 따른다. 취재는 정중하게 하고 기사는 날카롭게 쓰는 것이 기자다. 반대로 취재는 건방을 떨어가며 해놓고 기사는 물렁하게 써서는 기자가 아니다. 공직자에 대한 예우는 국가나 공공의 직함에 걸맞는 예의로 충분하다. 높은 벼슬아치들 앞에서 슬슬기거나 아양을 떠는 기자는 그도 기자가 아니다.

예컨대 순경은 무서워도 경찰청장은 무섭지 않는 것이 신문기자다. 나는 감히 말한다. 권력 앞에서 소신을 굽힌 적은 없다. 개인적 보복은 두렵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마음을 빼앗는 것은 권력의 군림이 아니다. 이를테면 천진난만한 아기의 미소, 그런 것엔 마음을 빼앗긴다.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사회생활의 일상이다. 신문기자는 이같은 일상이 훨씬 더하는 직업이다. 가령 출입처 같은데서도 종횡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많다. 출입처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는 신문기자가 돼야 한다. 기사를 예리하게 쓰는 것과 신뢰를 얻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주어진 조건, 즉 여건을 탓하는 직업인은 조건이 충족되어도 새로운 여건을 또 탓하기 마련이다.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해 극복하는 것이 직업인의 자세다. 특히 젊은 신문기자에게는 도전의식, 실험정신이 자산이다.

# 직장을 갖지못한 젊은 백수는 하루하루가 고역이다. 나도 20대 백수의 경험이 있다. 부모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동생들에게도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땐 서울에 돌산이 많았다. 채석장이다. 채석장에서 잡부 노릇도 했고 홍제동 시장터에서 호떡 장사도 해봤다. 당시 경험에 비추어 중요한 것은 좌절을 거부하는 강인한 의지다. 어떤 고난에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몸은 험한 일을 해도 맘은 고결하게 가졌다. 그러면서 자신을 연마하는 데 소홀함이 없도록 스스로 애썼다.

세상을 원망하는 것은 부질없다. 안된다고 생각하면 되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 어떤 훌륭한 사람도 젊은 시절에 겪은 시련은 다 있다. 남보다 백수의 세월이 긴 것은 시련의 세월이 긴 것 뿐이다. 언젠가는 기회가 오고 그 기회는 준비된 사람이 잡는다. 나 자신을 가치있게 만드는 것은 나 자신이다. 부모 형제도 대신할 수가 없다. 자포자기는 이래서 자신에 대한 최대의 죄악이다.

지금은 끝이 보이지 않는 암담한 어두움 뿐일지라도 햇볕을 볼 날이 반드시 온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섭리되는 세상사의 이치다. 인생의 마라톤 레이스에서 젊은 나이는 초반이다. 초반 선두가 결승 테이프의 영광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초반 부진이 낙오되는 것 또한 결코 아니다.

# 결혼 시즌이다. 청첩장이 제법 들어온다. 한 쌍의 젊은 남녀가 부부의 인연을 맺어 새로운 가정이 탄생되는 것이다. 정말 축복할 일이다. 혼사는 두 가정의 중대사에 국한하지 않는 사회적 가치가 매우 높다.

남남으로 만나 부모보다 더 가까운 부부가 되는 것은 서로가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은 달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쓴 것도 사랑이다. 아들 딸 낳고 살다보면 세상 풍파를 겪으면서 미운정 고운정으로 열심히 사는 것이 사랑이다. 부부의 사랑은 마치 거친 곡식을 채에 받쳐 흔들면 검부러기는 걸러지고 알곡만 빠지는 것과 같다. 채에 받쳐 흔드는 것은 세상 풍파고 걸러진 알곡은 곧 사랑인 것이다.

십여년 전에 ‘일구는 사랑, 까먹는 사랑’이란 칼럼을 쓴 적이 있다. 젊은 부부는 신혼의 사랑을 까먹는 사랑을 하기보단, 꾸준히 새로 일구는 사랑을 해야 한다고 당부한 것이다. 사랑의 예금통장을 곶감 빼먹듯이 빼먹는 것이 아니고 부단히 더 저금하는 사랑을 말했었다. 이를 위해서는 순수한 사랑이어야 한다. 사랑에는 조건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언제나 상대를 이해하는 것이 사랑이다. 이해(under stand)는 영문자 그대로 상대 아래, 즉 남편은 아내의 위치 아래서 아내는 남편의 입장 밑에서 상대를 생각하는 것이 진정한 이해다. 젊은이들이여 기를 펴라, 젊음은 그 자체가 빛을 뿜는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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