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이맘때면 내년도 예산 편성으로 깊은 고민을 하게 된다. 아니 어떻게 보면 고민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가용예산이 없기 때문이다. 증가하는 복지예산에 각종 도시 인프라 확충까지 돈 쓸 곳은 많아지고, 예산은 한정돼 있으니 죽을 맛이다. 우리나라 조세대비 지방세 비율은 21%로 일본(46.3%)이나 미국(48.1%)에 비해 턱없이 낮다. 그러나 지출 규모는 중앙정부대 지방이 55대 45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국·도비가 확보되지 않으면 파주같은 개발도시는 도로 하나도 제대로 놓을 수가 없다.
지방자치가 올해로 성년을 맞았지만 재정 상황은 이렇듯 걸음마 수준이다. 오히려 전국 평균 재정자립도는 지방자치 원년인 1991년에 비해 무려 14.5% 포인트나 줄어들었다. 244개 자치단체 중에서 90% 가까운 자치단체가 재정자립도 50%에도 미치지 못하고, 그 중에서 86곳의 자치단체는 20% 미만이다. 대부분의 자치단체가 사업은 고사하고 공무원 월급조차도 주기 어려운 형편이다.
파주는 재정자립도 52%로 그나마 나은 편이다. 그러나 한정된 예산으로 급격한 도시 개발에 따른 재정 수요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그동안 30건에 이르는 SOC사업을 진행하기 위해 지방채를 발행해 왔다. 작년까지 누적된 지방채 발행 규모가 원금만 1천817억원으로 채무 비율이 높은 편이다.
행정에 오래 몸담아온 나로서는 파주시장이 된 뒤 재정구조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신규 사업을 벌이기보다는 우선적으로 채무비율을 줄여나가는 정책을 펼쳤다. 그렇게 해서 더 이상 빚을 내지 않고 400억원에 이르는 원금과 이자를 갚았다. 임기 중에 채무비율을 예산대비 6%대로 낮춘다는 계획 하에 단계적으로 빚을 갚아가고 있다.
세수는 늘지 않고 지방채도 발행하지 않으면 자치단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어 부족 재원을 충당하기 위해 국·도비 확보가 필수다. 일부 자치단체는 전담팀을 구성할 정도로 혈안이 돼 있고, 파주시 전 공무원이 사활을 걸고 국·도비 확보에 나서는 이유다.
요즘 자치단체 재정 문제가 불거지다보니 국가에서 ‘재정위기관리시스템’이라는 특단의 대책을 내놓았다. 재정이 불건전한 자치단체는 지방채 발행을 억제하고, 지방교부세율을 낮추며 국고 지원시 불이익을 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규모 사업이나 지방채 발행은 중앙정부의 승인 없이 진행될 수 없다. 또한 지방 재정의 해답은 정작 중앙정부만 모른 체하는 국가와 지방간 세원 배분의 불균형에서 찾아야 한다. 근본적인 원인은 외면하고 자치단체의 책임으로만 몰아세워서는 어떠한 개선도 기대하기 어렵다.
얼마 전 경기도에서 국가와 지방간 세원 배분을 골자로 한 ‘지방재정 건전화 방안’을 제시했다.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성 있는 대책이라 생각하며 중앙정부의 전향적 검토가 있을 것이란 기대를 가져 본다. 여기에 자치단체 입장에서 한 가지 덧붙인다면 양도세를 지방세로 전환했으면 한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양도소득세의 지방세 전환 시 15% 내외의 지방세수 확충이 가능하다고 한다. 파주시의 세입 구조는 재산세가 710억원(34%), 지방소득세가 550억원(26%) 자동차세가 500억원(24%) 담배소비세가 250억원(12%) 순이다. 여기에 양도소득세를 지방세로 전환할 경우 500억원에 이르는 예산을 더 확보할 수 있다.
이제라도 지방자치의 근본이 제대로 정립돼야 한다. 국책사업인 복지사업의 기능만 이양하고 재정부담은 거꾸로 자치단체에 가중시키는 이율배반적 분권은 지양해야 한다. 지방자치가 ‘선거는 있으나 자치는 없고, 사무는 있으나 재원은 없다’는 말을 직시해야 한다.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식의 개선대책은 무의미하다. 수직이 아닌 수평, 타율이 아닌 자율, 의존이 아닌 자생이란 자치의 기본 원칙을 바로 세워야 빈사 상태에 놓여 있는 지방자치를 제대로 살릴 수 있다. 정치권과 중앙정부에 대승적이고 확실한 실천 의지를 주문한다.
이인재 파주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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