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길 시은소교회 목사 "부활은 예수가 주신 축복이죠"

“‘부활’의 다른 이름은 ‘소망’이고, ‘희생’이고 ‘헌신’입니다. 부활에 대한 확신만 있다면 아무리 현실이 어둡고 괴롭다 하더라도 우리 모두 끝까지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축복인거죠.”

 

2012년 수원시기독교총연합회 부활절 연합예배에 강사를 맡은 김성길 시은소교회 목사는 “‘부활’이야말로 기독교의 핵심 교리”라고 강조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반드시 부활할 것입니다. 이에 대한 믿음은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혹은 이득이 없고 손해만 보더라도 우리가 성경말씀을 따르는 인생을 살 수 있는 힘이 되어 줄 것입니다.”

 

김 목사가 이처럼 부활에 대해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데는 그의 인생역정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그것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의 삶이야말로 ‘부활’의 산역사였던 것이다.

 

김 목사는 1944년 평양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가 6·25전쟁으로 졸지에 고아가 돼 버렸다. 당시 김 목사의 나이 일곱살. 어린 나이에 부모 형제와 생이별을 하고 홀로 월남하게 된 김 목사는 이때부터 13년 동안 보육원을 전전해야 했다.

 

“항상 배고프고, 처참한 공간이었지만 매일 아침마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좋았습니다. 예배 후 청소를 하고 나면 일렬로 쭉 서서 세수 검사와 성경 말씀 한 구절씩을 체크했죠. 그걸 13년간 했습니다. 자그마치 5천구절입니다.”

 

배고픔과 냉대 등 숱한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 78:23)는 말씀만 붙잡고 온갖 시련을 이겨냈다.

19세 때 달랑 2천원을 들고 보육원을 나와 수면제를 들고 기도원으로 갔다.

 

“확실한 응답을 주시지 않으면 죽겠다는 뜻이었죠. 금식 사흘째 되던 날 분명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아들아, 네가 추위에 떨며 혼자 잠들 때도 나는 떠난 적이 없었다. 너는 쇠기둥 같겠고, 네 앞에 있는 시련과 시험은 거대한 쇠기둥 앞에서 부서질 것이다’고 하셨죠.”

그렇게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빡빡머리 소년은 대구 평리동교회 담임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했다.

 

김 목사가 수원과 인연을 맺은 건 지난 75년. 남수동에 50㎡(15평) 남짓의 점포를 세내어 시은소교회의 전신인 수원남문교회를 열면서 시작됐다. 이후 교회건축을 5번이나 하고 현재는 광교택지 개발지구에 대형교회를 세웠다. 신도수만도 4천명에 육박하는 대형교회다.

 

“교회를 개척할 때 한 번도 ‘과연 교회가 부흥할 수 있을까’ 고민한 적이 없어요. 확실한 기도응답을 받고 시작했으니 나무 막대기 두 개만 묶어 십자가만 세우면 된다고 생각했죠.”

김 목사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고아라는 사실을 당당하게 밝힌다. 사소한 일로도 인신공격을 받는 목회자의 세계에선 쉽지 않은 일이다.

 

“나같이 소외된 사람도 하나님이 쓰신다는 위로와 소망을 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망신당해도 좋다”는 김 목사. 그는 수없이 ‘죽고’, ‘부활’한 진정한 목회자의 표상이다.

 

윤철원기자 ycw@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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