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불미스러운 일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내부적으로 쉬쉬하며 입단속하고 언론을 통해 알려지지 않은 탓에 크게 사회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해당 종교의 신자들은 물론이고 국민들까지 크게 실망시킬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종교가 사회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종교를 걱정하는 세상이 되었다는 얘기까지 들립니다.
특히 최근에는 불교계에 대한 국민들의 비난과 염려가 태산의 무게와 같습니다. 때문에 불교계에서는 참회(懺悔)의 말들이 꼬리를 물고 물어 어느새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허물이 있다면 참회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참회가 현상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불교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는 계기가 되지 못한다면 부질없는 소란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또 하나의 공업(共業)을 짓는 일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나라 선불교의 뿌리가 되시는 혜능스님께서는 참회에 대해 “참이란 몸이 다하도록 짓지 않는 것이요, 회란 지난날의 허물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악업(惡業)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으면서 부처님 앞에서 말로만 참회를 하면 아무런 이익이 없다. 참회는 영원히 끊어서 짓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사회가 종교를 걱정하는 세상
물론 참회보다 더 좋은 것은 마땅히 지켜야할 계율을 어기지 않고 악업을 짓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보(果報, 과거의 인연에서 연유하는 업보)와 다생습기(多生習氣, 윤회하는 동안 몸에 밴 습관)는 쇠줄 같아서 끊어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최근에 불거진 불교계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연유합니다.
진정한 참회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아차리고, 알아차렸으면 연연하여 주춤거리지 말고 빨리 자기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 초발심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참회에는 무릎을 꿇는 것도, 목 놓은 통곡도, 피눈물도, 비장한 언사도 군더더기일 뿐입니다.
불교의 참회는 타종교에서 얘기하는 회개(悔改)와 다릅니다. 회개는 신에게 용서를 구하고 신에게 되돌아감을 의미하지만 참회는 마음속으로만 뉘우치는 것을 넘어서 공개적으로 말로 표현하고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 같이 참회와 회개가 다른 것은 타종교가 신이라는 타력에 의존하여 구원을 받고자 하는 종교인데 비해 불교는 자각(自覺), 스스로 깨쳐 부처가 되고자 하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초발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참회
참회를 할 때에 자신의 허물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데는 그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자신의 알아차림을 검증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여 아직도 알아차리지 못한 허물이 있는지, 기껏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대중에게 검증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에서 불신은 오해와 불화의 씨앗입니다. 우리가 상대에 대해 불신하게 되는 경우는 상대의 허물 자체보다도 그 허물을 숨기려하고 변명으로 합리화할 때입니다. 비록 허물이 있어도 공개적으로 솔직히 인정하고 다시는 그런 허물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는 것에서 신뢰의 싹이 돋아 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허물이 드러나면 그 허물에 대해 이런 저런 소리는 나오기 마련입니다. 최근 스님들에 대한 국민들의 비난과 염려의 소리가 넘쳐나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비난과 염려는 나를 해치는 칼이 아니라 죽은 생명까지 살리는 감로수입니다.
진흙이 없으면 연꽃이 피지 않습니다. 전화위복이라는 사자성어도 있고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문제는 참회의 진정성입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아차리고, 알아차렸으면 연연하여 주춤거리지 말고 빨리 자기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 초발심으로 돌아가는 것에서 바로 그 실마리를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영 담 부천 석왕사 주지·불교방송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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