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단상] 영웅이 없는 시대

과거 오락이나 레저가 발달하지 않았을 때 으뜸으로 쳐주는 세 가지 구경거리가 ‘불구경’, ‘싸움구경’, ‘사람구경’이었다고 한다. 법과 제도가 발전하면서 이제는 불구경이나 싸움구경 하기가 힘들어졌다. 모래판이나 링에서 벌이는 씨름, 권투 같은 격투기가 싸움구경을 대체했다. 불구경은 긴급 조난체계가 발달해 정말로 흔치 않은 일이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사람구경의 재미는 남아 있다. 당대를 풍미한 사람들의 언행을 보면서 태산을 바라보듯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이 일반인들이 느끼는 기쁨중의 하나이다. 꼭 승자에게만 볼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패자들 속에서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는 반전의 드라마에 감동한다.

과거 개발독재사회나 산업사회에서는 ‘특출한 사람’들의 신화를 많이 볼 수 있었다. 그야말로 ‘세상은 넓고 할 일이 많은’ 탓에 숱한 감동과 역전의 스토리가 양산됐다. 그 속에서 정주영, 이병철과 같은 거상이 나타났고 박정희, 김대중과 같은 정치적 거목이 성장했다. 투쟁과 갈등의 역사 속에서 고난과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영웅이 탄생했다. 부나 정치적 대물림이 아닌 홀연 단신 싸우고 쟁취하는 시기였다.

‘불행을 세자면 한이 없다. 행복을 세어도 한이 없다. 인생은 이러한 행복과 불행의 도전과 응전관계다. 어느 쪽을 택하느냐가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할 것이다.’(김대중의 일기 중). 이 말을 되새겨보면 인생의 성공은 쟁취하는 것이고, 혹독한 단련과 성찰의 세월을 거쳐야 영웅이 탄생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산업사회에서는 정치인, 경제인 못지 않게 종교인도 대중적인 명망을 얻는 경우가 많았다.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스님이 대표적인 분이다.

법정스님이나 김수환 추기경이 명예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깊이 있는 사고와 혜안이 세월의 검증을 거쳤기 때문이다. 허명을 채우기 위해 안달하지 않았고 명성을 갈구하다 제풀에 지쳐 쓰러지는 범인과는 달리 세상의 유행에 취하지 않고 정의로운 일관된 삶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그분들은 한결같이 거대한 암벽을 기어오르면서 작은 바위 틈서리 하나 놓치지 않고 디디고 올라 좌절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을 향도했다.

그러나 요즘에는 당대를 풍미했던 ‘고수’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재계를 돌아보면 대물림 회장님 투성이고 정계는 감동과 울림이 없는 ‘직업 정치인’ 밖에 눈에 보이지 않는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남에게 관대한 ‘관용의 미덕’이 없다.

금년 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민들에게 영웅의 이미지를 떠올리게하는 후보가 나올까 미지수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하지만, 영웅은 시대와 함께 개인의 처절한 노력과 열정속에서 성장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되고자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되지 않아야 한다. 버렸더라도 버렸다는 관념에서 조차 벗어나라. 선한 일을 했다고 해서 그일에 묶여 있지 말라.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가듯 그렇게 지나가라.’(법정스님 ‘무소유’ 중). 법정스님의 고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생전의 말빚을 갚기 위해 자신의 책을 절판하라는 엄격한 가르침을 남기고 수미산으로 떠난 법정스님의 말씀이 오랫동안 귓전에 남는다.

이번 대선을 통해 소리 없이 사라진 영웅들의 시대가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나길 고대한다.

김성제 의왕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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