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단상] 세계속에 꽃피는 여주도자기

‘여주’하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떠오르는 것이 ‘여주 도자기’, ‘여주 쌀’ 정도를 연상하게 되고 문화재와 유적지가 많은 곳으로 인식한다.

사실 여주는 도자기의 원료가 되는 점토와 백토, 규석 등으로 분류되는 고령토가 많이 출토되었고 판매를 위한 교통로(수로)가 잘 형성되어 생산과 판로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지금의 여주읍 현암리에 위치한 싸리산에는 백토가 대량으로 채굴되면서 여주가 도자기 생산의 메카로 등장하도록 했다.

또한 도자기를 굽기 위해 꼭 필요한 화목인 소나무도 손쉽게 구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우수한 도공들이 많이 활동하면서 여주는 도자기의 총 본산지로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도자기 생산을 위한 교육의 열정도 대단했는데 심지어 일제 강점기에도 여주읍 오금리에 전국 유일의 도예 연구소가 설치돼 운영될 정도였고, 작업장을 비롯한 도자기 시험소가 운영되는 등 여주도자의 생명력은 가히 위력적이었다. 이렇게 여주도자기가 번성한 것은 오랜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다.

여주도자기의 빛나는 자취는 경기도박물관에서 2차에 걸쳐 발굴 조사한 결과 중암리고려백자가마터를 통하여 고려 초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생생히 알려준다. 고려백자가마터는 도자유적 중 가장 이른 시기인 10세기대의 중암리에서 11세기대의 강천면 도전리와 부평리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 고려청자가마터는 11~14세기까지 운영되었는데 특히 13~14세기의 청자가마터가 북내면에 집중되는 점이 특징적이다.

조선백자가마터는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부터 후기까지 꾸준히 분포하여 역시 강천면과 북내면에 밀집되어 있다. 이는 여주에서의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생산의 흔적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가마터들은 고려 초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도자 역사의 전반적인 시기에 걸쳐 분포해 있어 여주가 천년의 도자 역사를 간직한 도자기의 고장임을 실감케 한다.

조선시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도기소(陶器所) 하나가 여주 관청의 북쪽 관산(串山)에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을 만큼 여주에서의 도자기는 독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일제강점기의 열악한 상황 하에서도 도자기의 전통은 면면히 이어져 1950년 5개의 생활도자기 공장이 새로 설립되었고, 1960년 후반에는 도자기 산업의 호황으로 많은 공장이 설립, 운영되었으며 1970년에는 40개소, 1980년에는 100개소 등으로 늘어났고 현재도 약 400여개의 도자기 공장이 여주 도자기 생산을 주도하고 있다.

여주도자기는 청자와 백자, 분청사기 등 고르게 생산되었다. 현대에 이르러 오랜 전통의 금자탑위에 선배 도공의 열정과 땀은 여주 도예명장을 비롯한 젊은 여주 도예인들의 땀과 정열로 면면히 이어지면서 창조적인 실험정신은 계속되고 있다. 올해부터 여주도자기축제에서는 관람객에게 매우 특별한 이벤트를 선보이고 있는데 바로 ‘접시 깨기 대회’가 그것이다.

도자기를 굽다가 못 쓰게 된 폐도자기 접시를 활용해 던져 깨는 것인데 던질 때 ‘쨍그랑’하고 깨지는 소리에 평소 쌓였던 스트레스가 일순간에 바람처럼 시원스럽게 날아간다.

여주도자기 발전을 위하여 땀 흘리는 것은 매우 보람 있는 일이다. 얼마 전 도자산업이 발달한 이탈리아 오르비에또를 우리의 도자관계자와 함께 방문했는데, 우리 측의 적극적인 노력 끝에 앞으로 이탈리아와 여주도자기 상호 발전을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하는 좋은 반응을 선물로 받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벼웠다.

이렇듯 여주도자기는 오랜 전통과 더불어 여주도자기축제와 경기세계도자비엔날레를 통하여 더욱 빛나고 있으며, 도자산업 발전에 열정을 갖고 뛰는 과정을 통하여 새롭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여주 도자기가 국민의 생활 곳곳에 스며들어 리빙 문화를 변화시키며, 세계속의 자랑스러운 한국 전통 도예로 굳건히 피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김춘석 여주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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