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불협화음을 아름다운 멜로디로

유학시절 제가 공부하던 학교는 자유주의 신학으로 유명한 학교였습니다. 소위 페미니스트라 불리는 여성신학의 대부인 로즈마리 루터라는 신학자가 있었고, 흑인 인권을 옹호하는 신학적 흐름도 가지고 있는 학교였지요. 때문에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주의해야 할 것들 중의 하나가 ‘언어사용’이었습니다.

혹시라도 수업시간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남성인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남성 우월주의적인 언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런 공부를 하는 신학생들이 서로 친구가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늘 자기들끼리만 몰려 다녔습니다.

백인들은 백인들끼리, 흑인들은 흑인들끼리, 히스패닉은 히스패닉까리, 한국 학생들도 한국 학생들끼리만 어울렸습니다. 그러다가 자기들이 조금 손해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인종차별 아니냐고 따져 묻기 일쑤였습니다. 그때 든 생각이 아무리 해방을 이야기하고, 자유를 이야기하고, 상대방을 위하는 것 같아도 정말 그 안에 상대방을 향한 사랑이 없다면 행동의 변화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찾아온 한 사람이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장면이 있습니다. 세상에 많은 가르침들이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질문합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십시오. 이것보다 더 큰 계명은 없습니다” 이 두 가지 대답에서 공통되는 것은 “사랑하라”입니다. 특별히 이웃을 대하는 방법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는데, 이웃을 사랑하되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저는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사는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혹시 우리 중에 누가 오늘 발에 걸려 넘어졌다고, 톱을 가져와서 발을 자르라고 하겠습니까? 혹 우리가 음식을 먹다 이가 혀를 물었다고, 이를 뽑으라고 하겠습니까? 혹 우리가 망치질을 하다 오른손이 잘못하여 왼손을 찧었다고 오른 손을 비난하기 보다는 다친 왼손을 입에 가져가 불어주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지체입니다. 아픔을 가져다 줬지만 원망하고 비난하기 보다는 감싸는 것이 지체입니다. 이것이 내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투나잇 쇼’에서 Jack Parr라는 사람이 사회자였을 때, 호세 멜리스라는 피아니스트가 음악 책임자였습니다. 그 토크 쇼에서는 종종 깜짝 쇼가 벌어졌는데, 하루는 Jack Parr가 녹화를 하다 말고 갑자기 피아노 쪽으로 가서 마구잡이로 건반을 두드려대며 불협화음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는 호세 멜리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아요, 호세. 당신이 이 피아노로 뭘 할 수 있는지 한번 보죠.” 그러자 호세는 Jack Parr가 두드렸던 건반을 정확히 짚어내며, 그 마구잡이 음에 아름답고 조화로운 음악 반주를 섞어 넣었습니다. 불협화음을 아름다운 멜로디로 바꾼 것이죠.

이 세상을 아름다운 멜로디로 가득 채우는 방법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럼 도저히 들을 수 없었던 불협화음이 아름다운 멜로디로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사랑하십시오! 그 사람이 마치 나인 것처럼! 이 세상이 아름다운 멜로디로 가득 채워지도록!

김 병 삼 분당 만나교회 주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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