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종교와 정치의 갈등

종교의 속성은 영원성을 향하고 있지만 정치는 현실적이기 때문에 사실상 서로의 만남은 언제나 갈등을 겪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국의 정치학자인 해럴드 라스웰(Harold Lasswell)은 정치란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갖느냐?(Who gets what, when and how?)’라고 하였듯이 정치란 항상 시장성을 우선하다 보니 경제를 우선으로 해야 하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즉 국가 정책의 최고의 승부는 국민 행복에 있기 때문에 가시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취하고 누리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는 무한의 세상을 향해 가기 때문에 이승의 가치보다 저승의 가치에 더 힘을 싣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행복의 개념도 정치와 차이가 많습니다. 그러나 물질문명이 팽배한 현대에선 어쩔 수 없이 종교도 여기에 붙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무한의 종교와 현실의 정치는 늘 갈등을 겪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종교와 정치가 잘 어울리는 것 같이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한편으로 보면 종교가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것에만 목표를 두고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정치가는 강력한 집단인 종교가 자기들에게 힘이 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물불을 안 가리고 무섭게 접근함을 봅니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정치 역사가 짧기 때문에 통치자와 그를 위해 힘을 실어주는 여당은 자기들의 통치기간에 나름대로의 실적을 국민들에게 과시해야 하는 강박 관념 때문에 국가 재정을 얼토당토않게 퍼붓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게다가 야당은 야당대로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당의 근본 정책으로 여길 만큼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어떤 종교집단은 선거 때를 기해서 여러 종교행사를 통해 그들의 힘을 과시하려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 보면 그 종교집단은 쉽게 세속화 되어버리고 맙니다.

정치는 국민의 행복을 위해 그 존재의미를 찾고 있다고 하지만 시장의 속성과 같이 인간의 모든 것 즉, 선과 악을 포함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온갖 비리는 하나도 예외 없이 정치집단에서 나왔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 시대의 정치풍토도 지금과 꼭 같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시 지도자들에 의해서 희생당하는 참극을 겪으시게 됩니다.

예수님이 당시의 정치지도자들에게 심한 어투로 야단을 치시는 것을 4복음 전체를 통해서 보게 됩니다. 대표적인 것은 마태오 복음 23장입니다. 당시의 실권자 집단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회칠한 무덤으로 비유하면서 심하게 꾸짖으시는 것을 봅니다.

종교와 정치는 언제나 불가근불가원의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멀리도 말고 가까이도 말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내야 합니다. 정치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선과 악이 공존하는 곳이라 여기에 종교가 가까이 하면 아주 쉽게 변질되고 맙니다. 중세기 때의 가톨릭교회가 바로 대표적인 예입니다. 종교와 정치가 하나였던 비극의 과거를 갖고 있습니다. 아직도 상흔이 역력히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정치는 현실이기 때문에 종교가 전혀 배척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정치에 대해 이렇게 지혜롭게 말씀하십니다. “황제(카이사르)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르코 12장 17절)”라는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지금은 입적하셔서 이승에 계시진 않지만 불교의 성철 스님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기억합니다. 큰 스님이 이승에 계실 때 정치의 큰 지도자가 어렵게 찾아왔었지만 만나주지 않았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불교가 하룻강아지 같은 정치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지 않았나, 감히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종교가 정치에 휘둘리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어쩌다 종교가 세속화 되었는지 가슴 아픈 일입니다.

최 재 용 천주교 수원교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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