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표적과 족적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족적을 남기고 싶어한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도 자기의 족적을 남기려고 무리하게 많은 일들을 해내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 또한 무언가를 이룩해야 하고 또 그 결과에 대한 포상도 받아야 자기가 무언가를 한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불교 신자들도 절에서 많은 기도와 자기 자신의 성찰을 하면서 마음공부에 열심히 정진합니다. 그 기도와 참선을 공부하는 가운데 과연 무엇을 위한 기도이고 참선공부일까 하고 되물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또한 자기공부의 족적을 남기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 전이되어 성취하는 목적이 된다면 성취하지 못했을 때에는 큰 실망과 자괴감이 들 수 있습니다. 쉽게 얘기해서 표적이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과 태도에 늘 익숙해져 있고, 그 때마다 만족과 불만족이 상반되어 어울리지는 않지만 그래도 만족하면서 또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우리들이 묵묵히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큰 족적이 될 수 있습니다.

어느 한 이야기를 소개할까 합니다.

미국 시골의 통나무집에 한 병약한 남자가 살았습니다. 그 집 앞에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 때문에 집 출입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어느 날, 신중님이 꿈에 나타나 말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집 앞의 바위를 매일 밀어라!”

바위를 옮기는 표적보다 미는 족적이 중요

실망보다 희망, 희망보다 함께 나누며 사는 삶이되길

그 때부터 그는 희망을 가지고 매일 바위를 밀었습니다. 8개월이 지났습니다. 점차 자신의 꿈에 회의가 생겼습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바위의 위치를 보았습니다. 그 결과 바위가 1인치도 옮겨지지 않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현관에 앉아 지난 8개월 이상의 헛수고가 원통해서 엉엉 울었습니다.

바로 그 때 신중님이 찾아와 그 옆에 앉으며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왜 그렇게 슬퍼하지?” 그가 말했습니다. “신중님 때문입니다. 하느님 말씀대로 지난 8개월 동안 희망을 품고 바위를 밀었는데 바위가 전혀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네게 바위를 옮기라고(to move the rock) 말 한 적이 없단다. 그냥 바위를 밀라고(to push against the rock) 했을 뿐이야. 이제 거울로 가서 너 자신을 보렴.”

그는 거울 앞으로 갔습니다. 곧 그는 자신의 변화된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거울에 비춰진 남자는 병약한 남자가 아니라 근육질의 남자였습니다.

동시에 어떤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지난 8개월 동안 밤마다 하던 기침이 없어졌구나! 매일 기분이 상쾌했었고, 잠도 잘 잤었지.” 신중님의 계획은 바위의 위치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를 변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변화는 바위를 옮겼기 때문이 아니라 바위를 밀었기 때문에 생겼습니다.

삶에서 바위를 옮기는 표적보다 바위를 미는 족적이 더 중요합니다. 족적보다 표적을 중시하면 내리막길 인생이 되고, 표적보다 족적을 중시하면 오르막길 인생이 됩니다.

나는 지금 표적을 중시하면서 살고 있는지, 아니면 족적을 중시하면서 살고 있는지 깊이 성찰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성 행 청계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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