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당신은 중산층입니까

7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녔다. 학년이 바뀔 때마다 가정환경 조사를 했는데, 그 방법이 참으로 유치했다. 선생님이 특정 물건을 대면 그 물건이 있는 집 아이는 손을 드는 방식이었다.

시간이 흘러 질문에 동그라미를 치는 방법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TV나 냉장고, 전축, 라디오, 전화기, 시계 등은 한집안의 생활 정도를 측정하는 중요한 도구였다. 내 경우 초등학교에 입학하고도 한참 뒤에야 전기가 들어온 마을에 살았으니 손을 들 수 있는 항목이라곤 라디오, 시계 정도가 전부였다.

2층 이상 건물이라곤 찾아볼 수 없으니 아파트인지 단독인지 연립에 사는지 등 주거 형태와 그 집을 소유하고 있는지, 아니면 빌려 사는 건지 정도는 쉽게 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정환경을 상, 중, 하로 구분해 놓고는 해당하는데 손을 들어야 할 때는 여간 망설여지는 게 아니었다. 도대체 우리 집 가정환경이 어디에 속하는지를 가늠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위의 잣대로라면 나는 ‘하’에 속하는 빈민 계층이 맞다. 하지만, 삼시세끼 굶지 않고, 형제들 모두 학교에 잘 다니는데다 무엇보다 책을 좋아하는 딸을 위해 매주 단행본 한 권씩을 사다주시는 건강한 부모님이 있는데 ‘하’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또렷이 기억하는 건 선생님이 ‘중 손드세요’ 했을 때 우리 반 아이들 50여 명 중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손을 들었다는 거다. 텔레비전 한 대만 있어도, 심지어 라디오 한 대만 있어도 중산층이라고 생각할 만큼 경제적인 측면만을 강조하지는 않았던 거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소득이 중위소득(전체 가구를 소득 순으로 나열했을 때 가운데 소득)의 50∼150%인 가구를 중산층으로 분류한다.

50% 미만은 빈곤층, 150% 이상은 상류층이다. 이렇게 봤을 때 우리나라 총인구에서 중산층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4년 현재 전체 1천137만 가구 가운데 766만 가구로, 70.0%를 차지한다. 우리나라 중산층 비중은 1990년 75.4%이던 것이 2008년 66.3%로 최저점을 찍었지만 6년 연속 상승하면서 지난해 70.0%를 회복했다.

그런데 시장조사전문기업 마크로밀엠브레인의 트렌드모니터가 전국 만 19세~59세 성인남녀 1천명을 대상으로 ‘한국사회와 중산층 이미지’에 대해 설문해 20일 공개한 결과는 확연히 달랐다.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응답자는 27%에 불과했고, 자신을 하류층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응답자는 46%에 달했다. 두 명 중 한 명이 자신의 삶이 하류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거다.

응답자 대부분은 중산층을 결정짓는 데 부동산을 포함한 총 자산규모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고 답했다. 이어 현금보유량, 직업, 학력·학벌 등의 순이었다. 개인의 지적 취향이나 문화적 수준보다는 부와 명예, 지위 등 외형적인 요소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비율이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는 거다. 이런 결과가 나온 데는 이유가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이 19일 내놓은 보고서를 보면 1990년 81만 6천 원이던 중산층의 월 명목소득은 2014년 390만 5천 원으로 4.8배 정도 뛰었다.

그런데 1990∼2014년 중산층이 부담하는 전세보증금 증가속도는 연평균 12.1%로 소득증가율과 비교해 두 배 가까이 빨랐다. 중산층 가계지출에서 교육비가 차지하는 비중 역시 1990년 13.4%에서 2014년 17.0%로 3.6%포인트 증가했다.

주거비, 교육비 부담이 급증하면서 여가, 의료·보건 소비는 위축돼 중산층의 삶의 질은 되레 후퇴한 것이다. 소득이 늘어나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지만 더불어 중산층의 삶의 질을 개선하려는 조치들도 뒤따라야 한다. 중산층이 많아야 잘 사는 나라다.

박정임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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