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일탈 이제 그만… 얘들아 우리 다시 학교 갈래?
이 때문에 일부 청소년들은 그들을 둘러싼 ‘학교는 커다란 담장안에 갇힌 감옥’처럼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지 공부에 일찍이 담을 쌓은 아이들은 학교 담장을 넘어선다. 이른바 일탈과 방황의 시작이다.
심지어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물론 일부에 한하는 얘기지만, 이들에게도 다시 올바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사랑과 관심이 필요하다.
미운오리에서 백조가 되기까지
김하인씨(21·여)는 2녀 중 장녀로 태어나 맞벌이로 노점상을 하는 부모님 대신에 초등학교 때부터 동생을 돌보며 자라왔다.
부모님은 군밤장사, 슬러시, 닭강정 등을 팔며 생계를 이어갔다. 당시 김 씨는 한쪽 다리가 없는 아빠가 부끄러웠다.
초등학교 때는 친구들이 행여 아빠를 볼까 집에서 멀리 떨어진 친구 집에 가곤 했다. 또 남들 다 가는 찜질방이나 수영장에 “부모님은 왜 우리랑 같이 못가지” 라는 서러움에 불평, 불만이 많았다. 김 씨는 결국 고등학생이 되던 해 엇나가기 시작했다.
결석하는 것은 기본. 목표도 꿈도 없이 “왜 우리 집만 이럴까”라는 원망스런 생각 뿐이었다. 그녀의 방황은 1년여 동안 계속됐다. 학교에서 학교 밖으로. 공부는 항상 뒷전이었고 집에 들어가지 않는 날이 더 많았다. 하지만 마음 한켠에는 학교가 있었다.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이 김씨에게 ‘경기도 꿈드림’을 권유했다. 그 당시 고등학교에서 경기도 꿈드림은 유명했다. 경기도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으로 학교 밖 청소년을 대상으로 상담, 컨설팅 등을 진행하고 있다.
꿈드림만 다녀오면 결석하던 애들이 공부도 열심히 하고 무언가라도 하겠다고 이야기하고 다니고, 작게 나마라도 변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김씨는 마음 속 또 다른 김하인을 그리며,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그곳에서는 김씨와 같은 상황에 놓인 또래 아이들이 전부였다. 그녀는 그곳에서 세상과 마주보기 시작했다.
프로그램을 다녀오고 그녀는 부모님 앞에 다시 섰다. 눈물이 흘렀다. 한쪽 다리가 없는 아버지를 보며 괜시리 지난 날이 후회스러웠다. 그날 부모님은 김하인씨를 아무 소리없이 안아줬다.
김하인씨는 현재 대학생활을 만끽하고 있다. 그녀의 꿈은 어려운 이웃을 돌보며 봉사하는 사회복지사가 되는 것. 김씨는 “꿈을 위해 노력하고 작은 것에 감사하며 살고 있다”며 “철 없던 시절 부모님을 창피하다고 생각했던 나 자신과 방황하던 시절이 한없이 부끄럽지만, 이제는 부모님에게 좋은 딸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방황을 벗고 희망을 입다…
“다시 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쿵쿵’하고 벅차오릅니다”
지난 8월10일 오전 9시30분께 수원의 한 중학교 교실에 조금은 특별한(?) 학생 18명이 긴장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옆에 앉은 짝꿍의 얼굴도 쳐다보지 못한 채 안절부절못한 모습이었다.
이 와중에 교실 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정적을 깼다. 성낙송 수원지법원장을 필두로 이동원 수석부장판사, 윤웅기 소년부 판사가 뒤를 이었다. 또 경기도학교밖지원센터와 경기도 관계자가 차례로 들어왔다.
이날 개교한 ‘Hi School(얘들아 학교가자)’의 입학식 모습이다. Hi School은 수원지방법원과 경기도, 경기도학교밖청소년지원센터가 뜻을 모아 보호처분을 앞두고 학업을 중단한 청소년의 학업복귀를 돕고자 만든 시범적 소년심판절차다. 학생들의 복학을 돕는 것이 주요 목표다. 성낙송 수원지법원장이 교장을, 이동원 당시 수석부장판사가 교감을 맡고 소년부 판사 3명이 학급 담임교사로 활동했다.
입학식이 열린지 4개월이 지난 현재 아이들에게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절반 정도의 아이들이 학교 복학에 성공했다. 이 중 2명은 검정고시를 준비하며 자격증 취득과 인턴십 참여 등 학업으로의 복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Hi School에 참여한 A군(18)은 “여름 중 가장 더운 8월, Hi School을 다녀오고 나서 학교가 정말 그리워졌다”면서 “배달 아르바이트로 하루하루를 살았던 지난 날들을 잊고 마음 속으로 ‘졸업’이라는 단어 품고 학교를 나가고 있다”고 속마음을 전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일부 아이들은 아직 학교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당시 Hi School에 참여한 윤웅기 판사는 “Hi School참여 이후 학교로 간 아이도 있지만 아직까지 방황하는 아이들이 있다”며 “꾸준히 연락을 통해 또 다른 길이 없는지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민훈기자
“때로는 형, 때로는 아버지처럼 열정으로 지켜낸 아이들 미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이들의 손을 잡고 13년째 연애 중입니다”
경기도학교밖청소년지원센터에서 근무하는 김형근 팀장(40)은 13년째 학교 밖 아이들의 곁을 지키고 있다. 그는 다소 까칠하고 다가가기 무서운(?) 인상을 가졌지만, 아이들 일이라면 누구보다 열정적인 사람이다. 또 그에게는 특별한 별명이 있다. ‘버팀목’이다.
10년이 넘도록 아이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얻은 별명이다. ‘자식이 잘못하면 내 탓’이라고 말하는 부모처럼 그는 시설과 소년원 등을 제 집 드나들듯 하는 아이들과 어려운 형편에 놓인 아이들을 지원하고 있다. 형으로, 때로는 아버지로서의 역할까지 하고 있다.
김 팀장이 본격적으로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 뛰어든 것은 지난 2002년. 대학 졸업을 앞두고 중학교와 초등학교를 돌며 봉사활동에 참여했다. 그곳에서 그는 사회와 학교를 사이에 둔 방황하는 아이들을 만나게 됐다. 친구가 내뱉은 말 한 마디에 방황과 평범을 오가는 일상을 보며 점점 아이들을 도와야겠다는 꿈을 피우게 됐다.
결국 2002년 졸업과 동시에 군포의 한 청소년 중장기 쉼터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그곳에서 검정고시를 가르쳤다. 피곤함도 잊은 채 그는 날이 밝도록 가르치고, 또 가르쳤다. 그의 일상은 ‘아이들’을 중심으로 흘러갔다. 그렇게 13년이 흘렀다.
김 팀장은 “쉼터에서 처음 만났던 아이들이 지금은 건강한 사회인이 됐다”며 “사회복지사, 피자집 점장, 직업 군인 등으로 성장해 이제는 나에게 힘을 보태주는 후원자가 됐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 당시 쉼터도 여건이 좋지 않아 어려움이 많았지만 아이들이 하루하루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보면 힘들었던 나날을 다 잊을 수 있었다”면서 “힘이 닿는 날까지 아이들 곁에서 희망과 꿈을 심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덧붙였다.
한편 학교를 벗어나 있어 막막하고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학교 밖 청소년들은 청소년전화(지역번호+1388)로 연락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정민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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