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어느 날치기 재판의 사정

칼과 몽둥이를 든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를 에워쌌다. 무슨 강도를 잡으러 온 것도 아니고, 조용히 말로 해도 될 일을 칼과 몽둥이가 웬 말인가, 그가 타일렀지만 소용없었다. 그날 밤, 예수는 그렇게 개처럼 끌려 법정에 서게 되었다.

 

야간법정이라! 흔한 일은 아니었다. 파행의 기미가 곳곳에서 드러났다. 이 정도의 사안이라면 원래는 71명의 공회원이 모인 대(大)산헤드린에서 다루어야 할 텐데, 23명밖에 모이지 않았다. 어차피 한밤중에 졸속으로 처리하려던 재판이라, 일부러 소(小)산헤드린을 꾸린 모양이다.

 

일차 혐의는 예수가 거짓예언자라는 것이었다. 순진한 사람들을 현혹해서 진리로부터 벌어지게 한 사이비. 그러나 진짜 혐의는 따로 있었다.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그의 불손한 태도가 문제였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제도권 종교인들의 자존심에 심각한 흠집을 냈기 때문이다. 예수가 갈릴리 같은 변방에서 힘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인기몰이를 한 것은 그럭저럭 봐줄 만한 일이지만, 성전을 모독한 것은 차원이 달랐다. 성전이야말로 자기들의 기득권을 뒷받침하는 보증수표이니까 말이다.

 

법정은 이 두 가지 사안에 대해 예수를 집중 추궁했다. 결과는 무혐의였다. 이럴 때는 꼼수를 써야 한다. 대제사장이 물었다. 네가 왕이냐. 침묵으로 일관하던 예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내가 그니라! 유대법정에서 누군가 스스로를 왕이라 칭했다고 사형을 언도하는 법은 없다. 하지만 로마법정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로마황제에 대한 반역죄에 해당한다. 신성모독 혐의로 붙잡힌 예수는 졸지에 정치범으로 둔갑했다. 로마의 식민지인 유대 땅에서 로마가 파견한 총독에게 붙어 권력을 보존해온 유대 지도자들의 정치공작이 통했다. 그렇게 예수는 역사상 가장 음흉한 날치기 재판의 첫 번째 희생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달렸다.

 

공생애(公生涯) 초기부터 예수가 제도권 종교인들에게 눈엣가시였던 사실을 떠올리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된다. 요컨대 ‘의사 면허’도 없는 주제에 예수가 명의(名醫)로 소문난 것이 제도권 종교인들에게는 굴욕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이런 갈등은 우리네 삶에서도 늘 관찰된다. ‘주변인’이나 ‘재야’ 따위의 딱지가 붙으면 제도권과 대립각이 세워진다. 물론 제도권도 나름 체면이 있어서 아무나 잡아들이지는 않는다. 막강한 대중적 인지도를 발판으로 자기네가 세운 진리의 정설에 위협을 가해야 칼을 들이댄다.

 

예수는 실로 왕 같은 권위를 행사했다. 그의 말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언제나 진리였다. 그러니 그의 입에 재갈을 물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진리는 제도권 안에서만 안전하게 통용되어야지, 밖으로 내돌리면 통제하기가 불가능한 까닭이다. 그래서 예수를 반역자로 몰아 십자가에 못 박았다. 다시는 그를 믿는 사람이 나오지 못하게끔 완전히 매장시켰다. 하지만 이것이 예수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는 데 놀라운 반전이 있다. 그는 다시 부활했고, 그를 믿는 사람의 수는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사화(史禍)를 보는 마음이 편치 않다. 이른바 재야학자 대 제도권학자의 학문 논쟁에 사법부가 끼어들어 후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실형을 얻도 받은 재야학자는 졸지에 사이비로까지 몰려 제도권학자들의 융단폭격을 받고 있다. 50여권의 저서를 통해 대중역사가로 명성을 쌓아온 이덕일 선생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십자가에 못 박은 시대로부터 누군들 자유로울까. 사순절의 묵상이 저절로 한숨이다.

 

구미정 숭실대학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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