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손이 하는 일은 더 있다. 악수하는 손, 쓰다듬는 손, 흔드는 손, 주먹 쥔 손, 엄지 척! 상황마다 사람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실어 나른다. 이런 손이 오그라들어 있었다니, 그는 아마도 감정 표현마저 거세당했으리라. 하기야 한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으로서 자기 자리를 확보하지 못한 사람, 이른바 ‘을’의 습성이 대충 그렇다. 괜스레 위축되는 것도 서러운데, 그 느낌을 솔직히 표현했다가는 더더욱 설 자리가 없어질까 두려워 그냥 참는다.
그런 그에게 예수의 시선이 닿는다. 이 시선은 각별하다. 그가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언어조차 무용지물로 만드는 시선! 이 자타불이(自他不二)의 눈으로 예수가 말한다. “일어나라. 한가운데 서라.” 항상 중심에만 있던 사람들의 심기가 엄청 불편했겠다. 아닌 게 아니라, 오른손이 오그라든 그 사내의 손이 활짝 펴지자, ‘그들’은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예수를 어떻게 손봐줄까, 모의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다. 종교와 법과 질서가 한 몸처럼 돌아가던 당시 사회의 중심은 언제나 그들이었다. 마가복음 3장은 그들이 화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마음이 너무나 굳어있었기 때문이라고.
얼마 전, 세계 30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 교수가 우리나라를 다녀갔다.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그는 알파고의 등장으로 불안감에 휩싸인 우리를 이렇게 위로했다. 아무리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겼다고 해도, 확실히 인간지능보다 인공지능이 우위를 점한다고 해도, 그래봤자 인공지능에게는 ‘마음’이 없다고.
사람이 사람인 까닭은 마음 덕분이다. 마음이 있기에 사람은 남의 불행을 보고 공감할 수 있으며, 남의 불행을 막기 위해 협력할 수 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마태복음 11:17) 불감증의 시대에, 강남역과 구의역을 물들인 포스트잇의 행렬을 보라. 그것은 깃발이다. 타인을 향해 마음을 닫은 시대를 향한 짱돌이자,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여는 만장이다.
예수라는 사내는 그랬다. 마음이 아기속살보다 더 연했다. 힘들고 아픈 사람을 보면 머리보다 마음이 먼저 움직였다. 복음서 저자의 표현대로, ‘스플랑크니조마이’는 예수의 전매특허였다. 애간장이 녹아내리고 창자가 끊어질 만큼 고통스러운 마음. 그 마음이 기적의 원천이었다. 그 마음이 예수를 참 사람으로 만들었다.
한데 일부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여 집단행동을 할 때 보면 무섭기 짝이 없다. 대화니 소통이니 다 필요 없고, 오로지 진리만 수호하면 그뿐이라는 강인한 태도 어디에서도 예수의 마음을 찾기 어렵다. 율법과 교리를 엄격히 준수하는 일은 알파고가 훨씬 더 잘할 테다. 알파고의 자가 발전 속도를 도저히 따라잡기 힘든 오늘, 인간이 살 길은 여전히 옥토처럼 부드러운 마음이 아닐지. 지금 구의역에서 인간의 마음이 펄럭인다. 스플랑크니조마이!
구미정 숭실대학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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