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환기, 대한민국의 길을 묻다] 고미숙 고전평론가

“글 쓰고 소통하고… 백수는 자본주의 시대 최고 직업”

▲ 지식인공동체 ‘감이당’을 이끌고 있는 고미숙 고전평론가는 “우정과 지성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이 최고의 삶”이라며 고전과 함께하는 여행 ‘길벗 프로젝트’로 쌓은 전 세계 관계도를 소개하고 있다. 전형민기자
‘백수 예찬론’을 펴는 이가 있다. 기득권 층이 하나같이 일자리 창출 약속을 남발할 만큼 청년부터 노인까지 모든 이가 직업을 갈망하는 시대에 말이다.

 

지식인공동체 ‘감이당’을 이끌고 있는 고미숙 인문학자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급기야 우리나라 대표 고전평론가답게 조선 후기 실학자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1805년)까지 ‘호출’하면서 백수 예찬론 굳히기에 들어간다. “연암도 아마 중년 백수를 자처했을 걸요. 

그것보다 더 나은 삶을 선택할 수 있을까. 조선시대 최고 명문가 자손으로 태어난 청년이 입신양명을 포기하고 평생 백수로 살면서 글쓰고 우정을 나눴죠. 그건 말이에요, 우정과 지성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이 최고의 삶이었기 때문이에요.”

 

백수야말로 자본주의 시대에 최고의 직업, 행복한 삶의 주체로 설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을 들어봤다.

-‘대한민국 위기론’이 지배적이다. 

반문하고 싶다. 아주 좋은 시대가 있었나. 절망적인 시대도 없었다. 그 어떤 시대도 절망 혹은 희망은 아니라고 본다. 이 시대적 조건을 어떻게 배치하고 활용하느냐의 문제다. 물론 좋아진 줄 알았는데 퇴행한 지점은 있다. 

-퇴행한 부분은 무엇인가.

교육이다. 2012년에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를 썼다. 학교 현장은 당시 제기한 문제에서 나아가지도 못한 채 굉장히 황폐해있다. 학생도 만족 못하고 교사도 자존감이 없고 학부모는 불만족 투성이다. 교육에 대한 철학과 인식의 빈곤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미래를 일궈야 할 교육계의 황폐화, 그 이유는. 

화폐가 기준이 되면 삶은 점점 황폐해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과 자본의 증식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균형 없이 모든 부문에 돈이란 척도밖에 없는 상황이다. 

교육부, 학교, 부모 모두 교육에 대한 철학이 없다. 아이들은 돈을 기준으로 성공을 이야기하고, 취업을 위해 대학을 간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고 선생은 사제지간 형성이 아니라 사고 발생을 막는 데 목적을 둔다.

 

이런 상황에서는 창의적 인재 양성이나 자율적이고 주도적인 학습 등이 모두 공염불이다. 취직 때문에 대학가고 돈을 벌기 위해 취직하고 결국 소비하고 증식에만 몰두하는 것. 이것이 삶은 아니지 않나. 백번 양보 해도, 시대가 그렇다 해도, 인간은 그렇게 살 수 없는 것 아닌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돈의 힘을 무시, 그 욕심을 내려놓기 쉽지 않다. 

처음에는 먹고 살기 위해 돈이 필요했고 부동산 투기 같은 자본 증식을 목표로 했다. 그리고 돈 있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소비했다. 사람들은 불안하면 소비하고, 힘들수록 쾌락에 몰두한다. 몸의 원리상 위장은 80% 이상 차면 토하게 돼 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소화할 수 있는 그 이상은 독이다. 마찬가지다. 인간은 물질로 채울 수 없다. 바닷물을 마시는 것처럼 갈증만 더해갈 뿐이다. 돈이 있는 사람도 소비로 만족하지 못해 공허해한다. 돈 없는 사람은 돈 있는 사람들의 소비를 보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이런 구조에서는 부자든 빈자든 모두 다 자기 삶의 주도권을 잃고 패배자가 된다.

 

소비와 쾌락을 멈출 수 있는, 견디기 힘든 상황을 버틸 멘탈을 양산해야 한다. 그 방법은 로고스(지성)말고는 없다. 지성을 가진 인간에게서 ‘이건 더 이상 인간의 삶이 아니야’라는 각성이 발현된다. 지성을 근간으로 한 각성이 발휘돼야 물질에 의존하는 경향성을 줄일 수 있다. 

-저서와 강연, 언론 인터뷰 등에서 ‘백수되기’를 주장했다.  

그렇다. 문제는 돈이 아니다. 공자도 백수였고 소크라테스도 특별한 직업이 없었다. 이들은 영혼의 번민을 안고 길 위에서 진리를 터득해 글로 옮기는 자유인이었다. 

내 노동을 조율하고, 강의를 할지 말지 스스로 정하는 심플한 삶이다. 물질적인 부유함을 탐하기 위해 괴로운 일이라도 참고 버티는 건 심신을 망치는 지름길이다. 좋아하지 않는 것을 하면 몸과 마음이 병들게 돼있다. 정규직, 연봉이 해결되면 또 다른 욕망을 소비하는 데 몰두한다. 

우리는 정규직이 아니라 길 위의 현자들을 멘토로 삼는다. 모든 사람이 소비와 쾌락 끝에 죽는 것이 아니라, 자유인을 원한다는 방증 아니겠는가. 어느 순간 청년은 물론 전 세대가 백수가 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백수가 특별한 상황은 아니다. 그것이 왜 비관적인지 모르겠다. 프리랜서로 내몰렸지만 구속되지 않으면서 스스로 자신의 노동과 경제를 조정할 수 있는 기회다. 삶을 심플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럼에도 백수가 미래, 백수를 직업으로 추천하는 것은 억지스럽지 않나. 현실의 벽도 있다. 

물론 백수도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창출할 수 있는 활동을 해야 한다. 지성을 익혀서 글을 쓰고 사람과 소통하는 것이 바로 그런 활동들이다. 돈과 상관없이 할 수 있는 것이 사람과 글이다. 글이란 사람이 매일 어떤 공부를 지속해가는 기준이자 표현 양식이다. 수행이라고도 얘기한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면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다. 

제도권에 흡수되지 않아도 내 네트워크를 밟아갈 수 있다. 조선시대 최고의 명문가 자손으로 태어났음에도 입신양명의 뜻을 버리고 자유인으로 산 연암을 보라. 글을 읽고 쓰며 우정과 지성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이 최고의 삶을 사는 길이자 고결한 쾌락을 얻는 길임을 보여준다. 현실의 벽을 논하는 것은 그만큼의 절실함이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글쓰기가 가능할까.

이렇게 대학이 많고 학벌이 높은 시대에 날마다 가장 많이 할 수 있는 지적 훈련이 글쓰기다. 누구나 글을 쓰는 시대가 왔다. 원고지도 필요없고 기계 하나면 된다. 글과 말은 정말 중요해졌다. 앞으로 새로운 직업이 생겨날텐데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창의적으로 말하고 표현하느냐가 반영된 것들이다.

궁극적으로 말과 글은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는 것이다. 예능 프로그램을 보자. 동네 말많은 아줌마 같은 수다를 떤다. 그것에 심오한 통찰이 있나. 그럼에도 보통 사람들이 수다 떠는 프로그램은 더 늘고 있다. 말과 글을 쓸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직업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만 한다면 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나 혼자서는 이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대통령도 정치인도 이 세상을 못 바꾼다. 정치인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개념은 올드하다. 역사가 증명한다. 예수도, 공자도, 간디도 당시 사회를 바꾸지 못했다. 역사에서 단 한 번도 그런 적은 없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80년대식 진보세력의 판타지다. 정말 다수의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자기를 온전히 바꾼 한 사람을 본 후다. 세상을 바꾸자고 외치는 것은 쉽다. 술 한 잔, 담배 한 개피 끊는 것이 더 어렵다. 

사회를 바꾸겠다면서 자신의 욕망을 그대로 가져가 혁명의 주체가 된다면 욕하던 사람과 똑같은 꼴이 된다. 최근 들은 멋있는 교육혁명가의 말이 하나 있다. ‘그렇게 해서 세상이 바뀌겠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세상이 나를 멋대로 하게 놔둘 순 없다’고 답했다고 한다. 인간은 다만 자기 자신의 한걸음만 바꿀 수 있을 뿐이다. 욕망의 흐름을 바꿔야 한다. 

-이런 이야기조차 버거워하는 빈곤한 사람들이 많다. 앞서 최고의 생존전략으로 제시한 공동체가 해결할 수 있을까. 

그런 설정 자체가 교만이라고 본다. 물론 불치병 같은 절대 빈곤은 사회적으로 공동의 과제다. 하지만 돈이 없어 공부할 수 없다는 등의 물질적인 빈곤의 문제는 아니다. 정말 가난해서 할 수 없는지 묻고 싶다. 약자니까 내가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권위와 주인의식이 생긴다. 받는 사람 역시 부담스럽다. 책임이나 동정을 가질 필요는 없다. 

연대는, 공동체는 기본적으로 평등해야 한다. 스스로 두 발로 서서 지성에 접속하고 싶다는 사람은 가난해도 도와주지 않아도 길을 연다. 그 마음이 생기느냐가 관건이다. 그렇게 형성된 공동체가, 그 인맥이 진정한 자산이 된다.

고미숙 작가는…

△ 고전평론가, 작가

△ 현(現) 감이당 연구원

△ 고려대학교 독일문학과 졸업

△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문학 박사

△ 전(前) 지식인 공동체 ‘수유+너머’ 연구원

△ 저서 <고미숙의 몸과 인문학>, <바보야, 문제는 돈이 아니라니까>,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외 다수

 

류설아·권오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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