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까지만 해도 교과서에 등장하는 한민족의 특징은 ‘은근과 끈기’였다. 그러던 우리가 언제부터 ‘빨리빨리’ 민족이 되었을까? 어쩌면 짧은 시간 안에 압축적 근대화를 겪으면서 빠르게 변신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불안이 우리들의 DNA 속에 ‘빨리빨리’를 새로 장착시켰는지도 모른다. 중국 대륙의 ‘만만디’ 문화를 생각해보면 ‘빨리빨리’ 문화는 지정학적인 원인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 DNA가 모든 분야에서 잘 작동되지 않는 것 같다.
최근의 정치문화를 지켜보면 더욱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는데, 변화된 국민의 인식과 현실을 감조차 잡지 못하는 기성 정치의 구태의연함 속에 ‘빨리빨리’ DNA는 보이지 않는다. 종교계를 되돌아봐도 그렇다. 서구 것을 가져왔든 그렇지 않든 그 방식에 큰 변화는 없다. 한국사회 전반이 근대적인 체제로 변화했지만,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은 여전히 인맥과 학맥으로 얽혀 있다 보니 빠르게 성과를 내야 살아남는 성과사회에서 오히려 불협화음을 내고 있는 듯 싶다.
그러한 불협화음이 가장 도드라지는 곳이 세대 간의 갈등이다. 대학에서 강의하는 동료 학자의 말에 따르면 요즘 젊은이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한다. 그는 심지어 “인종이 다르다”고 말하는데, 대학원 학생들을 만나는 것이 고작인 나 같은 사람은 그런 말을 들으면 젊은이들이 우리가 닿을 수 없는 세계에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하긴, 사회 전체가 ‘빨리빨리’에 적응하며 민첩하게 현실의 변화에 반응해왔지만, 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기성세대의 체질과 달리, 그 새로움을 몸으로 익힌 젊은 세대의 속도를 기성세대가 어찌 따라잡을 수 있을까? 세대 간의 갈등은 영원히 극복될 수 없을 것 같기도 하고, “늙은 사람들이 죽어야 끝난다”는 말이 우스게 소리만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젊은이 역시 바우만이 <액체근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변화하는 시대에 밀려 언젠가 그들의 시대에서 후퇴하게 될 것이다. 바우만의 지적처럼 현대사회란 모든 구성원들을 영원히 뒤처지게 만드는 사회이므로.
그렇다면, 만약 그렇다면, 정말 필요한 것은 날마다 변화하는 속도에 우리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니체가 말했듯이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 아닐까? 천천히 반응하는 것, 인내심을 가지고 “자기에게 다가오게 하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것이야말로 “은근과 끈기”의 민족이라고 자칭했던 우리들이 가장 잘 해왔던 것이 아닌가.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에 부풀어오르고 있다. 권력의 오랜 공백을 메울 기민한 대응도 필요하지만 압축적 근대화를 겪으며 ‘빨리빨리’ 속에서 잃어버렸던 끈기와 느리게 반응하는 현명함을 회복해야겠다. 진짜 변화는 끝까지 끈기있게 추구하는 자만이 이룰 수 있기 때문에.
명법 스님 은유와마음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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