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을 가져가지 않아 물건을 구입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권을 가지고 갔던 그녀가 이번에도 빈손으로 왔다. 비행기 티켓을 가져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여권과 비행기 티켓을 가지고 갔던 그녀가 여전히 빈손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신용카드가 자기 이름이 아니어서 물건을 구입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동료들이 한바탕 웃는 동안에 세 차례 헛걸음을 했던 그녀가 이번에는 주저앉아 버렸다. 현금을 가져가든지, 남편과 다녀오라고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어떻게 되었을까? 돌아오는 길에 샌프란시스코에서 갈아탈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남편과 함께 갔던 그녀가 이번에는 자기가 원하는 만큼 초콜릿을 두 손 가득 들고 환한 웃음을 지으며 당당히 걸어왔다.
우리 문화에는 ‘삼세번’이라는 것이 있다. 아무리 패자라 할지라도 세 번까지 기회를 준다는 의미다. 가위바위보를 해도 패자는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잡기 위해, 승자는 패자를 위해 삼세번을 요청하고 문제없이 받아들인다.
심지어 상대방이 어떤 결정을 해야 할 때도 ‘세 번 만의’ 여유를 주고 하나, 둘 수를 헤아리지만 셋으로 넘어가기 위해 ‘둘 반’, ‘둘 반의 반’, ‘둘 반의 반의 반’이라고 억지로 헤아리기도 하는 것은 생각할 여유를 더 주려는 의미라고 볼 때 삼세번은 아름다운 배려의 문화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한 번, 두 번, 세 번에서 끝낸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석삼년’, 즉 노력하는 자를 위해 삼년씩 세 번이라도 오래토록 기회를 주고 기다려 줄 수 있다는 기다림 정서의 발로이기도 하다. 생각지도 않았던 세 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네 번째 당당히 자기가 원하는 것을 두 손 가득 들고 돌아온 동료에게 무한의 박수를 보내는 것도 이런 의미이겠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용서에 대하여 가르치면서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가르치신 적이 있다(마태복음 18:22).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일곱 번 용서하면 되는지 질문했던 한 제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일곱 번도 많은데 일곱 번씩 일흔 번을 하라는 것은 숫자에 제한받지 말고 끝없이 용서하라는 말이다. 삼세번 배려의 절정이라 하겠다.
사람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수 없는 시행착오를 통해 겨우 한 길을 열어가는 존재다. 그렇다고 인간이 불가능한 존재라는 말은 아니다. 실존철학자 칼 야스퍼스에 의하면 인간은 ‘도상(途上)에 있는 존재’로서 비록 미완성이지만 가능성의 존재다. 그 영향을 받아서인지는 몰라도 독일의 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그는 인간을 ‘되어감’(becoming)의 존재로서 측정할 수 없게 열려 있는 신비스러운 존재라고 하였다. 삼세번은 이와 같이 가능성 있고 되어가는 인간을 위해 다시 한 번의 기회를 베푸는 배려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사에 꼬여 있는 것처럼 부정적이고 시비하기만 하는 사람들은 왜 그럴까? 마음 씀의 문제가 아닐까?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분명히 시행착오하는 경험 위에 세워지고 발전해 온 것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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